top of page

미술관 옆

죄수들의 보행

송호춘

‘감시’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이 생각나기도 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CCTV가 생각날 수도 있다. 오늘은 이와 더불어 감시라는 단어와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1890년 고흐가 그린 <죄수들의 보행>이다. 사실 죄수들을 작품의 대상으로 삼은 그림들은 많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정말 노골적으로 죄수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교도관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1890년, 고흐가 귀를 자르고도 몇 번의 발작을 더 일으킨 후 생 레미의 정신병원 독방에 갇혀 있을 때 그렸다. 독방 안에서의 작업만이 허용되던 때, 그는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등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곤 했는데, 이 그림도 구스타프레가 지은 <런던>이라는 책 속에서 판화로 실려 있는 삽화를 모사해 그렸다고 한다. 그당시에 일반인들은 교도소의 죄수들을 볼 수 없었다. 고흐도 죄수들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런던>이라는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죄수들의 삶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늘 감시받는 죄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흐는 자신의 삶을 투영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죄수들의보행> _ 고흐 1890 필자는 이 그림을 보면서 세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원, 벽, 그리고 감시... 죄수들은 걷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를 향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좁은 공간에서 원을 그리며 쳇바퀴를 돌고 있다. 이 원은 얼마나 돌아야 하는 것일까. 이들은 원을 돌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의 표정은 모두 어둡고, 시선은 대부분 땅을 향하고 있다. 대략 1시 방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것 같다. 이들이 서로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 쳇바퀴를 더욱 공포스럽게 하는 것은 ‘벽’이다. 고흐는 벽에 대한 상상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과연 이 벽은 얼마나 높은 것일까. 높게 솟은 벽이 꽉 막혀 있는 가운데 문 하나도 달려 있지 않다. 다만 창문 몇 개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창문들은 너무 높게 위치해 있어서 죄수들의 숨통을 틔우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창문들에는 철창이 쳐져 있어서 더욱더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답답함을 더하게 하는 것은 감시자들의 눈빛이다. 그림 하단 오른쪽에는 세 명의 감시자들이 있다. 한 사람은 죄수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그들을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들의 감시 때문에 죄수들은 자신들의 원행렬을 흐트러트릴 수 없을 것이다. 감시자들은 한 사람 한사람을 응시하면서 이들의 마음까지도 감시하고 싶을 것이다. 겉으로는 순응하는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 탈출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니 감시자들은 그 나름대로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까지도 감시하고자 하는 감시자들이 참으로 불행해보인다. 필자는 최근 중국 북경에 있는 한 법원에 연수를 다녀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든 재판내용을 CCTV로 촬영하여 녹화하고 있다. 심지어 중앙통제실에 들어가면 인민최고법원의 재판 뿐 아니라 각 지방법원의 재판들을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다. 중국법원의 판사님은 필자를 중앙통제실로 불러서 중국의 사법 감시 시스템에 대해서 자랑하듯 설명을 하였고, 필자가 사진을 촬영해도 되냐고 물으니 너무나도 쿨하게 승낙을 해주었다. 그리고 판사님의 말에 따르면 인민들도 일정한 신청절차를 거쳐서 인터넷을 통하여 모든 재판과정을 시청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은 중국인민대표회의에서 사법권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러니 사법부가 중국인민대표회의로부터 완전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때로는 인민대표회의의 지침에 의해서 판결이 내려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사법시험이 도입된 지 몇 년이 채 되지 않았고, 사법시험이 도입되기 전에는 중국인민대표회의에서 판사들을 직접 임명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법부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미개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중국사회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 나름대로의 시스템이고 또 일종의 문화인 것 같다. 필자는 사법부의 독립성이니, 당사자들의 사생활 보호 등을 들먹거리며 중국 사법제도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위에서 본 고흐의 그림처럼 ‘감시’는 그 감시의 대상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중국의 사법부를 보면서 ‘감시’가 사법작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를 형성해 나가는 중국에 대해서 오히려 신기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감시의 이면을 함께 생각해보자.

Fri Jul 05 2013 01:56: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