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송호춘

마라의 죽음

Wed May 09 2012 12:44: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필자는 어려서부터 미술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미술 실기평가를 제출하면 거의 C를 받곤 했었다. 그래서 항상 미술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피카소와 게르니카’라는 전시회를 다녀오게 되었다. 특히나 나를 압도하던 <게르니카>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필자는 서양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전시회에도 종종 다니곤 하였다. 이번 5월호부터는 서양미술사와 관련한 작품과 전시회 방문기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평소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미술을 너무 자신과 동떨어진 무언가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숲속에서 아름다운 새소리를 즐기듯이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 미술을 즐기고 감상하시면 될 것이다. 다만, 필자는 그러한 여러분의 감상이 풍성해질 수 있도록 약간의 가이드를 제공하려 한다. 이번 호 에서 초점을 맞추고 싶은 내용은 ‘미술과 정치’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미술가이면서 왕성한 정치가였던 사람을 한 사람 꼽으라면 반드시 ‘자크 다비드’를 꼽을 수 있다. 다비드는 1784년 파리에서 태어난 인물로, 프랑스혁명으로 인한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특히 당시의 급진 혁명파였던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을 지지하며 자신의 예술작품을 자신의 정치활동을 위해서 적극 활용하였다. 오늘은 그의 작품 중에서 <마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살펴보려고 한다. 저널리스트이자 급진주의자 마라는 민중의 정치 참여를 고취시켰던 프랑스 정치인이다. 마라는 프랑스 혁명 후에 세워진 정치기구인 국민공회의 일원이자 자코뱅 당을 이끄는 인물로 프랑스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마라는 루이 16세가 단두대 형을 받는데 선봉자 역할을 했을 정도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급진주의 성향은 대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세력인 프랑스 왕권주의자들에게는 제거해야만 하는 정적이었다. 1793년 귀족 출신의 열렬한 공화당원이었던 여인 샬롯트 코르도네가 거짓 편지를 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피부병으로 욕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마라의 죽음>을 멀리서 감상해보면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것은 작가가 화면의 아랫부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랫부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윗부분은 어두운 색깔로 처리를 했고, 아랫부분에는 하얀 천을 그리고 그 하얀 천에 빨간색 피가 묻어 있는 모습을 그려 아랫부분의 색을 강조하고 있다. 다비드는 마라가 하얀 천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마라를 순결한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했다. 또한 마라가 죽어 있는 자세를 마치 ‘피에타’의 예수님이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하게 표현함으로써 마라의 죽음을 순교적인 죽음으로 형상화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마라의 오른손에는 펜이 들려져 있는데 마라가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임을 강조하여 마라의 죽음을 국가적 슬픔으로 확장하려는 다비드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라의 왼손에는 샬롯트 코르도네가 가져온 편지를 그려 넣었다. 그 편지에는 마라에게 자비를 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비드는 그 편지 내용 중에 특히 ‘자비’라는 부분을 엄지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그려 넣음으로써 마라가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화면의 오른편에는 ‘마라에게 다비드가’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직사각형의 상자가 있다. 이것은 마치 비문을 떠올리게 하는데, 마라의 죽음을 기리는 ‘친구’ 다비드의 마음을 담으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비드는 이렇게 화면에 ‘우정’이라는 감정적인 요소를 개입함으로써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를 자신의 정치적 동력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나는 인민의 목소리를 들었노라. 그리고 거기에 따랐노라’ 라고 했다. 다비드는 마라가 죽은 후 대중들에게 전시되었던 시체를 보았지만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살해당했던 당시 상황을 그대로 표현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통해 마라에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동정심은 급진 개혁파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다비는 그의 정치적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마라의 죽음>이른 작품을 이용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술을 정치의 하위에 두어 수단으로 삼았다기 보다는 예술과 정치를 동일선상에서 보고 양자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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