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Homo economicus

용의자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관리자

안녕하세요, 2010년 1월호부터 Homo Economicus 코너를 맡게 된 민초8기 이동진이라고 합니다. 전임자이신 경원이형에 비해 여러모로 모자란 부분이 많을 것 입니다 ㅜㅜ. 지금껏 코너를 잘 이끌어 와주신 경원이형의 노력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기사를 작성할 것이니 잘못된 부분이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따뜻한 덧글을 부탁 드립니다! 이번 호 에서 다룰 소재는 용의자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입니다. 많은 민초인 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글의 전개를 위해서 간략하게 상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용의자들은 과연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걸까요? <상황: 어떤 강력사건의 공범자라고 의심되는 2명의 용의자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2명의 용의자를 서로 다른 취조실에 격리시킨 뒤, 각각의 용의자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합니다.> 검사: 만약 당신들이, 이번 사건에 관해 순순히 자백을 한다면 비교적 가벼운 형벌인 징역 3년을 구형하겠소. 행여나 둘 다 범행을 부인하고 결백을 주장한다면 증거가 불충분한 현재 정황상, 당신들에게 책임을 묻긴 힘들 것 이니, 그 대신 과거 당신들이 저지른 여죄를 추궁해 징역 1년을 구형하도록 할 작정 이오. 하지만 둘 중의 한 사람은 범죄 사실을 자백했음에도 다른 한 사람이 범행을 부인한다면, 자백한 자에겐 수사에 협력한 대가로 파격적인 보상을 줄 작정이고 끝까지 부인한 자에겐 최고형인 20년을 구형할 것 이외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도록 하시오. 용의자A: 제길, 어떡하지? B와 얘기만 나눌 수 있다면 끝까지 버티자고 합의를 보면 쉽게 해결될 문제지만. 나는 지금 그를 만날 수가 없어ㅜㅜ (두 명의 용의자들이 서로 다른 취조실에 격리되어있음을 생각해주세요.) 괜히 끝까지 버티다가 B가 혼자 자백해버리면 어쩌지? 혼자 독박 쓰잖아!!! 안되겠어. 그냥 안전하게 자백하는 편이 낫겠어. 그러면 최악의 경우는 면하게 될 테니까. 이와 같은 생각을 B도 하게 되고 결국, 용의자 둘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범행사실을 자백하게 됩니다.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을 슬기롭게 해결한 검사는 그 후 탄탄대로를 걸었다는 훈훈한 결말입니다. ~_~ 용의자들에게는 분명 범행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는 언뜻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언뜻 강의 시간에 경제학에서는 합리적인 인간을 가정한다고 했는데, 제가 잘못 들은걸 까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별 경제주체는 제한된 자원 아래에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 하는 선택을 한다고 가정했는데 이와 같은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ㅜ.ㅜ 각 용의자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얻게 되는 효용(Utility)을 보수 행렬(Payoff Matrix)에 따라 정리해보면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쉽고 명확하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효용은 경제주체가 특정 선택을 해 얻는 만족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구체적인 숫자로 측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보수 행렬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습니다. B가 범행사실 부인 B가 범행사실 자백 A가 범행사실 부인 (15, 15) (1, 18) A가 범행사실 자백 (18, 1) (10, 10) (괄호 속의 첫째 숫자는 A가 얻는 효용, 둘째 숫자는 B가 얻는 효용) 보수행렬을 자세히 살펴보면, 언뜻 보기에 비합리적인 선택이 사실은 각 용의자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선택이, 두 용의자 모두에게 범행사실을 자백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한된 자원 아래에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선택을 한다. 여기에서는 제한된 조건(=상대방의 선택을 주어진 조건으로 봅니다) 아래에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용의자들은 합리적인 Homo Economicus 가 맞네요. ^^* 부연 설명을 하자면, 용의자 A를 기준으로 B가 범행사실을 부인했을 때 A가 범행사실을 부인하면 A는 15의 효용을 얻고 자백했을 경우엔 18의 효용을 얻습니다. 그리고 B가 범행사실을 자백했을 때 A가 범행사실을 부인하면 1의 효용을 얻고 자백했을 경우엔 10의 효용을 얻습니다. 즉, 두 경우 모두 A가 범행사실을 자백했을 때 각각 18, 10의 효용을 얻으므로 범행사실을 부인했을 때 보다 더 이득입니다. 용의자 B의 입장에서도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B도 범행사실을 자백하게 되겠죠? 이와 같은 이유로 검사는 슬기롭게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각 용의자들이 범행사실을 자백하는 선택을 경제학에서는 우월전략(Dominant Strategy)라고 합니다. 우월전략이란 상대방이 어떤 전략을 선택하는지에 관계없이 자신의 보수를 더 크게 만드는 전략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우월전략들이 짝을 이루어 균형을 이루는 경우를 우월전략균형(Dominant Strategy Equilibrium)이라고 말합니다. 용의자 A,B 모두에게 범행사실을 자백하는 것이 우월전략이고, 각각의 우월전략이 만나 균형을 이루었으니 위의 경우 또한 우월전략균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용의자들이 Homo Economicus 라는 점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혹이 씻겨진 듯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다시 한번 이야기를 곱씹어 보면, 비록 각 용의자들에게 범행사실을 자백하는 것이 우월전략이었다고 해도 둘 다 범행사실을 부인하는 선택이 용의자들에게는 최선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용의자들이 얻게 되는 효용의 총합도 용의자들이 모두 범행사실을 부인하는 경우가 가장 크니까요. 아아 ㅜ.ㅜ 또 다시 경제학의 도움이 필요할 듯 합니다. 사실 위의 용의자들의 경우처럼 경기자(Player)에게 우월전략이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러므로 우월전략균형이라는 것도 성립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이보다 조금 느슨한 조건의 균형을 고안하게 되는데, 이를 내쉬균형(Nash Equilibrium) 이라고 합니다. 내쉬균형 이란 각 경기자가 상대방의 전략을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자신에게 최적인 전략을 선택할 때 즉,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선택할 때, 이 최적전략의 짝을 내쉬균형 이라고 합니다. 우월전략균형이 상대방의 모든 전략에 대해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전략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면 내쉬균형은 ‘주어진’ 상대방의 전략에 대해서’만’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전략의 존재를 필요로 하므로 우월전략균형보다 더 느슨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쉬균형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그 결과가 항상 파레토효율(Pareto Efficiency)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점인데, 파레토효율이란 하나의 자원배분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되지 않고서는 어떤 한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할 때의 배분상태를 정의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 사회내의 모든 자원이 적재적소에 배분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내쉬균형이 파레토효율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어떤 한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와 같은 경우를 경제학에서는 파레토개선(Pareto Improvement)이 가능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한 사회 내에 남는 자원이 있어서 이를 필요한 곳에 투입이 가능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의 경우에도 용의자들이 범행을 부인한다면, 자백하는 경우보다 모두 더 많은 효용을 누릴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용의자들의 효용의 합 대신 한 사회 전체의 효용의 합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누구 하나 손해보지 않고 더 높은 수준으로의 개선이 가능한 상태인 것입니다. 즉, 각 개인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손 치더라도 이를 사회적 입장에서 넓게 바라보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 다양성이 일반화 될 수록, 그에 비례하여 사람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개입하게 됩니다. 더 바쁘고 더 많은 사람과의 접촉을 하게 되는 시대에서 사람과 사람간의, 다양한 이해관계 간의 의사소통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된 것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마주치는 현실은 서로가 타협 없이 자신의 주장만 거듭하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뿐 입니다.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보다 만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요? 용의자의 딜레마는 그 해답의 존재에 대해 일말의 가능성을 던집니다. 이 사례에서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조건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첫 번째 조건은 두 명의 용의자는 서로 다른 취조실에 격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둘 사이에는 신빙성 있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는 말입니다. 만약 두 명의 용의자가 같은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았다면 당연히 모두 범행사실을 부인하는 선택을 했겠죠?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만은 모면하려고 범행사실을 자백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현실에서도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 간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 혹은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상위 가치라는 것이 없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없다기 보다는 명시적으로 표출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 상호간에 협상을 중재할 수 있는 매체 혹은 협상의 방향을 주도할 수 있는 상위 가치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면 매번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마다 극단으로 치닫는 불행을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 번째 조건은 두 명의 용의자에게는 ‘자백이냐 부인이냐’ 하는 선택의 기회가 단 한번만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즉, 위의 보수구조에 따라 각 경기자는 딱 한번의 게임만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용의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용의자들이 본 사건 이외에도 다수의 강력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똑같은 선택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물론, 이 경우에 용의자들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가정합니다.) 서로의 선택이 제 살 깎아먹기 인 것을 알고 상생을 위한 길을 걷게 되겠죠? 현실에서는 이러한 점이 보다 부각 됩니다. 특정 분야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람들은 종종 한 번이 아닌 매년 연례행사(?) 식으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죠? 이 과정에서 서로가 입게 되는 피해를 인지할 수만 있다면 극단의 길이 아닌 상생의 길을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경제학 논문 중에는 복수의 경기자들이 특정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가장 중요한 유인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성이다’ 라고 지적한 논문이 있습니다. 게임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무한 번 게임을 지속하는 것과 같은 현실에서 관계의 지속성은 이해관계자들이 자발적인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다는 데에 일말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들은 이미 국제정치학에서도 연구되어, 개별 국가들이 보이는 비합리적인 행동들에 관해 합리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상위 정부가 없는 개별국가 간의 협상에서 상대 국가의 전략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개별국가들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위의 용의자들과 같은 입장이죠. 이에 세계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협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협동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개별국가에 우선하는 국제 레짐(regime)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 제 글이 많이 부족할 것입니다. ㅜ.ㅜ 아직 경제학을 많이 공부해나가야 하는 상경계열 학우이기 때문에, 저보다 뛰어난 경제학적 식견을 가지신 민초인 들의 많은 관심바랍니다~_~ 덧글 남겨주시면 참고해서 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나가는 한해 잘 마무리하시고 다음 호에 뵈요. ^^* 이 글은 이준구 교수님의 미시경제학 책과 웹 2.0 기반의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ㅜㅜ

Sun Apr 25 2010 10:32: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