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생해외통신

신동민

[민초인의 영국유학기 4] 영국의 지적전통, 그 신선함과 아쉬움

Sat Mar 05 2011 23:3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어느덧 영국 유학을 시작한지 반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하는데 10년이 걸렸다는데, 아무리 강산의 변화뿐만 아니라 생각의 속도까지 빨라지는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었다 한들, 새로운 지역의 지적전통을 완전히 이해하기에 반년남짓한 시간은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이는 곧, 삼십 평생을 올곧이 한국에서만 살아왔고, 십여년간 한국 상아탑의 지식세계 속에만 있던 이가, 단지 두 번의 계절변화를 겪고난 후 풀어놓는 영국의 지적전통에 대한 소회는 그렇게 적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기변명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10여년의 시간을 한국에서 가르치는 국제정치학만을 접해왔기에, 그만큼 다른 것에 대한 궁금함과 지적 갈증이 축적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자장면 곱빼기’의 원칙처럼,목이 타들어갈 때접하는새로운 수분은 더 큰 청량감과 시원함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또한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수분에 대한 궁금함을 ‘20년간의 위기’로 대표되는 E.H.Carr의 저작이나 근현대 서양외교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축적해온 이라면, 비록 단기간이지만 보다 빠른 속도로 새로운 지적전통을 흡수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적실함과 적실하지 않음 사이의 갈림길에서 전하는 영국의 지적전통은, 한국 또는 적어도 국제정치영역에서 한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의 그것과는 다른 점이 있어 보인다. <제국전쟁 박물관, 영국국제정치는 양차대전과 함께 성숙되었다> 대화와 토론, 성찰적 접근 겉으로 접하는 영국 교육의 특성은 너무나도 ‘대화’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석사수준의 강좌는 대부분 강의와 세미나가 한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주당 강의를 한시간하고 세미나를 한시간 정도 진행하는 형태도 있고, 한 학기 일정기간을 강의를 하고 이후에는 세미나만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요는 머가 되었던, 형식적으로 일방향의 지식전달이 아닌, 상호작용을 요구하는 형태의 수업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식 안에서의 내용은 더욱더 대화로 점철된다. 강의도중 강의실을 바라보면 손을 들고 있는 학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말하고 싶다는 표시다. 그러면 교수는 강의를 멈추고 학생의 질문이나 커멘트를 받는다. 그리고 그 발언은 다른 학생이 이어받기 마련이다. 대화는 교수와 학생이 꼬리를 문다. 대화 때문에 때론 강의가 산으로 가고 지엽적인 부분에 머물더라도, 교수는 짜증을 내지 않는다. 교수와 학생간 보이지 않는 ‘계급’차이를 이미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어서, 일방향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한국 학생의 관점에서는 다소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영국의회와 우리의 그것간의 차이를 떠올리게 한다. 매주 수상이 의회에 출석하여서 그림자 내각의 일원들과정부정책에 대한 설전을 주고 받는 '수상질의(Prime Minister Question)'장면은마치 토크쇼를 방불케 한다. 수상과 의원은 발언권을 존중하는 선에서 반복적으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이 때 대정부 질의라 하여서 국무의원이 일방향적으로 무엇인가를 읽고, 이에 대해서 국회의원이 자기만의 이야기로 핏대를 세우나 국무의원은 무슨 당나라 이야기하나 하는 표정을 짓는 여의도의 그 장면이 오버랩된다.그 차이가 영국 수업과 한국의 그것과의 다른 점과 닮아있는 듯 하다. 박사과정의 수퍼바이징도 마찬가지다. 지도교수가 정의한 논문을 쓰는 과정은 ‘스스로 길을 찾는 긴 여행’이며, 자신은 그 여행을 미리 겪은 선배이자 벗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도교수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먼저 방향제시를 하지 않는다. 미리 약속을 잡는다면, 바쁘다는 이유로 수퍼바이징을 대부분 거절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련된 긴 대화를 통해서 학생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스스로 깨닫는 것을 장려한다. 다른 학문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만큼은 영국은 한국에서 습득해온 지식과 다른 지적 향기를 듬뿍 내뿜는다. 그것은 바로, 실증주의(positivism)에 대한 회의와 성찰적 접근에 대한 강조다. 사회과학도 자연과학처럼 보편진리가 있으며, 연구자는 객관의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현 미국식 주류국제정치학 저변에 깔려있는 실증주의는, 영국의 국제정치 강의실에서 만큼은 그 대접을 못 받는다. 대신 교수, 강사들은 ‘돌아보는 접근’을, ‘가치’와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접근을 제시한다. 중국 성장의 영향을 주어진 패권전이론의 시각에 대입해보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와 가치 검토를 통한 전략문화의 시각에서 분석해본다. 기계적으로 접하는 국제정치학의 구성주의를, 저멀리 칸트와 헤겔, 막스 프랑크프루트 학파로부터 전해오는 서양의 지적전통 위에 위치시킨다. 분쟁시 정보수단의 중요성은 영국에서만큼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라크전쟁의 이론적 기반이 된, ‘민주주의간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통계 분석으로 도출해낸 미국과는 달리, 영국의 국제정치학 공부는 한수 접고 들어가서 ‘인간의 지식은 과학적 외피아래 자신의 권력을 증가시킬 목적으로 사용된다’는 Carr의 비판적 시각을 잘 담아내고 있는 듯 하다.?마지막으로, 영국 국제정치 강의와 그 학생들의 공간적 범위는 영국, 유럽에 머무르지 않는다. 번지고 있는 리비아 사태를 두고도, 백이면 백 교수와 학생은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백이면 백시간 그 강좌 주제와 상관이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중동 정세의 변동을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한국 대학의 국제정치 강의실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다. 교수와 학생이 리비아를 두고 격론을 벌이고 있을지, 교수는 실라부스의 충실할 뿐인지, 학생은 받아적기 바쁠지 말이다. 아쉬움과 우리의 모습 이런 영국의 교육법이 모두 좋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세미나를 마치고는 종종 ‘논의는 많은데, 남는 것은 없다’, ‘분석은 많은데, 문제해결은 없다’, ‘생각할 변수는 많은데, 예측가능성은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영국교수에게 한다면 이미 미국식 가치관이나 실무영역 습관에 오염되어 있다고 진단받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당장의 과제에 대한 궁금함을 안고 유학을 온 이에게 때로는 영국의 접근법은 다소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더 아쉬운 점은, 영국인들은 말하기와 생각을 공유하기는 좋아해도, 낮은 자세에서 모르는 것을 알려하는 태도는 부족한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동아시아 정치에 토론을 하면서, 정작 그 수업의 있는 문제당사자인 한국, 중국, 일본 학생의 의견을 청취하려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중국을 논하면서 중국인의 저작이나 시각이 없이, 서양인들이 보고, 서양인들이 쓴 저작물을 가지고 서양인의 시각을 나눈다. 중국을 논의하는데, 중국이 없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적전통 위에서, 이를 쌓아온 영국인들의 유전자내에 이미 내재된, 그래서 의도하지 않은 우월감이 무심코 표출되는 것이라면 과도한 유추일까? <영국의 지적전통은 우뚝 서있는가,역사속의 그것으로만남아있을 뿐인가> 이렇게 반여년간의 시간동안 어설프게 그러나 열심히 관찰한 영국의 지적전통을 옆에 두고, 한국의 그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20여년간 국토 위에서 3번의 강대국간, 또는대리전을 치르고, 아직까지도 분단이라는 냉전의 잔재를 안고 있으며, 현재의 미국과 떠오르는 중국간 접점에 놓인 한국은, 적어도 국제정치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그것이 겪은 지난 세월을 볼 때, 국제정치 영역에 있어서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인든 독특한 특성을 지닌 국가가 아닐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만약 그 국가의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 독특한 역사 위에서 형성된, 혹은 형성되고 있는 ‘한국식 지적전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짧은 기간 영국 교육을 접하며, 그리고 지난 10여년간 학부 1학년 꼬꼬마부터 내 이름으로 된 글을 한편 쓰고 나올 때까지 보낸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 묻게 된다. 한국의 지적전통은 성립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가? 한국이 지향하고 있다는 그간의 한국과 다른 속성을 지닌 한국을 의미하는 세계 속의 진정한 ‘중견국(middle power)’은, 행사를 넘어서 다른 이들에게 우리의 시각이 무엇이다라고 자신있게 전달하고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굳건한 지적기반이 형성되어었을 때 달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때가 바로 남이 겪어보지 않은 우리의 문제를 우리에 적실한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갖추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유학을 하면서, 어제의 한국과 내일의 한국을 생각해보게 되는 이유다. 졸업생 신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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