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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프다

우보연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아까 시켜먹은 짜장면이 체했는지 속도 좋지 않다. 근데 난 지금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다. 내일까지 영화제작논문도 제출해야하고, 마감시일을 넘긴 웹진기사도 써야하는데, 난 그냥 멍하니 모니터에 띄워놓은 한글2004의 빈 여백만 보고 있다.옆으로 시선을 돌린다. 책상위에는 먹다만 빵부스러기와 귤껍질, 빈 컵이 어지럽고, 논문 작성을 위해 쌓아올린 자료들이 무너져 뒤섞여있다.전화가 온다. 친구가 술 먹잔다.‘에이씨, 술이나 먹을까?’근데 꼼짝도 하기 싫다. 머리 아프다는 핑계를 된다. 핑계는 아니다 진짜 아프다. 다른 때 같으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겠지만, 오늘은 꼼짝도 하기 싫다. 나의 거절에 친구가 당황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또 모니터를 응시한다. ‘논문부터 쓸까? 기사부터 쓸까? 아니면 청소부터 할까? 머리 아픈 핑계로 그냥 이불 속으로 콕 처박혀 버릴까?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지?’옛날 러시아에 오블로모프라는 게으름뱅이가 살았다. 그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몽상만 했다.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그저 침대에 누워서 몽상만 했다. 지금 그가 무척 부러워진다. 걱정 없이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 지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다.머리가 더 지끈거린다. 지렁이 100마리가 머릿속을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속도 좋지 않다. 고민하다가 결국 화장실에 간다. 약간은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하나의 통증이 사라지니 남은 하나의 통증이 더 뚜렷해진다. 머릿속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떼가 자신의 존재를 계속 부정하는 주인을 원망하며 더 크게 꿈틀거린다. ‘이놈의 지렁이놈들 다 죽여버려야지.’ 서랍을 뒤적여서 아스피린을 찾았다. 근데 유통기간이 좀 지났다. 지렁이떼들이 비웃듯이 더욱 꿈틀된다. 망설이다가 그냥 먹었다.‘아. 머리가 더 아픈 것 같다. 이러다 죽는건가.’CD플레이어의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아까 듣다가 만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잠깐 눈을 감고 음악에 머리를 맡기지만 통증이 줄어들지 않는다. ‘진짜 죽는건가?’ 내가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찍어야 할 영화도 아직 많이 남았고, 아직 못 읽은 책이 내 책장에 넘치는데. 그리고 결혼도 아직 못했고, 파리도 아직 못 가봤는데.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하나?‘머리가 계속 아파온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눕는다. 그리고는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에는 불이 꺼지면 형광 빛을 내는 별, 달, 새, 유에프오등등의 장식이 붙여져 있다. ‘내가 저걸 왜 달았지?’ ‘내가 달지 않은 것 같은데.’‘누가 달았지?’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손에 무엇인가 잡힌다. 리모컨이다. TV를 켠다. 최신형 내비게이션이 나왔다고 한다. 7인치 터치스크린에 외장형 마이크 핸즈프리도 장착되어 있다. 본체 보호케이스도 준단다. 쇼핑호스트가 나와서 끈질기게 내비게이션을 사라고 날 유혹한다. 채널을 바꾼다. 어릴 때 보던 영심이가 ‘O'자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나와서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경태도 꺼벙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둘이 또 티격태격 싸운다. 또 채널을 돌린다. 황우석교수 때문에 국제적인 망신당했다며 한 사람이 열변을 토해낸다. 또 다른 사람은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나라 생명공학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사람이 황우석 교수라며 반박한다. 또 다른 사람은 당신 한국사람 맞냐며 삿대질한다. 시끄럽다. 머리가 더 아프다. TV 전원을 끌려다가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린다.영화가 나온다. 장소는 프랑스로 보이는 어떤 곳이다. 저기가 어디지. 많이 본 곳 인데. 기억을 더듬는다. ‘앗 저기는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눈을 크게 뜨고 초점을 TV에 맞춘다. 영화 속에서는 한 남자가 바닥에 누군가 붙여놓은 파란 화살표를 따라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른다. 언덕을 오르는 남자의 표정은 호기심에 가득차 있다.‘이 영화 제목이 뭐였지? 아... 아... 뭔데...’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는 남자를 한 여자가 미행한다. 호기심에 가득한 표정으로 여자는 조심조심 남자의 뒤를 밟는다. 여자의 귀여운 표정을 바라보며 나도 조심조심 남자의 뒤를 밟는다. ‘저 여자 이름이 뭐였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 지렁이들이 아직 죽지 않고 기억 세포를 하나 둘 갉아 먹는 모양이다. 유통기간 지난 아스피린으로 그것들을 죽이려한 내가 잘못이다. 다시 영화에 집중한다. 영화 속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주책없이 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가졌고, 종업원을 못살게 구는 가게 사장을 골탕 먹이고,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준다. 이제야 기억이 난다. 그녀의 이름은 아멜리에다. 마음속 가득 희망과 사랑을 머금은 아멜리에를 바라보며 나 또한 미소를 짓는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TV의 전원을 끈다. 난 일어나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머릿속 지렁이들이 유통기간 지난 아스피린의 약효 때문인지, 아니면 아멜리에의 심장박동 소리에 놀랐는지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콩닥콩닥거리는 아멜리에의떨림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글 l 우보연 cinewoo@hanmail.net

Sat Dec 24 2005 11:52: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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