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향기

“시간을 죽이는 킬러” - 2005 노벨문학상 수상자 해롤드 핀터의 『배신』(The Betrayal)

김다미

“시간을 죽이는 킬러” - 2005 노벨문학상 수상자 해롤드 핀터의 『배신』(The Betrayal) 해롤드 핀터 전집 8, 해롤드 핀터 지음, 정경숙 옮김, 2002, 평민사 대학 서점을 둘러보다 보면 각 수업에서 선택받은 교재 더미들과 마주치게 된다. 필독서랄 것이 특별히 없는 문학 코너는 대체로 한산하게 마련인데, 유난히 봉긋한 한 더미의 책 위에 자랑스레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2005 노벨상 수상 해롤드 핀터 전집” 대학 서점의, ‘지성’에 호소하는 상술에 감탄하던 찰나, 1학년 새내기, 들뜬 가슴을 안고 문학 코너 한쪽 구석에 숨어 있던 해롤드 핀터 전집 중 한 권을 집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핀터레스크(Pinteresque)’라는 형용사로 통용되는 독창적인 스타일로 현대 연극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유하고 부조리 극작가 해롤드 핀터. 시종일관 ‘비어 있는’ 그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배신』(The Betrayal)을 당해야 할 것 같다. (로버트) 음, 주제가 그다지 새로운 것 같지 않아서. 안 그렇소? (에마) 주제가 뭐라고 생각해요? (로버트) 배신. (에마) 그건 아니지요. (로버트) 아니라? 그럼 뭐지? (에마) 아직 끝까지 못 읽었어요. 나중에 말할게요. (로버트) 꼭 말해 줘. 사이. 물론 내가 잘못 이해했는지도 모르지. 침묵. 1978년 11월 15일 런던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배신』(The Betrayal)은, 극 중에서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핀터가 환기하듯이 ‘불륜’이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차용하였다. 그럼에도 초단위로 계산되어 편집된 시간 속에서 관객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1장] 1977년 후반, 에마(로버트의 아내)와의 관계가 절친한 친구 로버트에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리는 사과를 하기 위해 로버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2장] 관객의 기대와는 달리 로버트는 둘의 관계를 4년 전(1973년)부터 알고 있었고 두 남자는 (봄날의 서재에서) 극렬한 설전 없이 문명적이며 평화롭게 대화를 마친다. (제리) 자넨 왜 내게 말하지 않은거야? 사이. (로버트) 아는 줄 알았지. (제리) 하지만 확실치 않았잖아, 안 그래? 정확한 건 아니었어! (로버트) 그래. (제리) 그런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사이. (로버트) 뭐를? (제리) 네가 안다는 사실 말이야, 이 자식이! (로버트) 욕은 하지마, 제리. 사이. …(중략)… (로버트) 이번 여름에 어디 갈 건가, 가족들하고? (제리) 호수 쪽으로 갈까해. [3장] 극의 시간은 2년 전인 1975년으로 돌아가고 관객들은 제리와 에마의 관계가 파경으로 치닫는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 [4장] 시간은 다시 1년 전인 1974년으로 돌아가고 로버트의 집에 초대 받은 제리는 일주일 정도 뉴욕으로 출장을 다녀와서 스쿼시를 치기로 약속한다. (제리와 에마의 관계를 알고 있는 로버트는, 제리와의 헤어짐을 슬퍼하는 에마를 위로한다.) 로버트와 제리가 나간다. 에마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로버트가 돌아와 에마에게 키스하고, 에마는 갑자기 머리를 남편의 어깨에 대고 조용히 울음을 터뜨린다. 로버트는 아내를 안는다. [5장] 시간은 다시 1년 전인 1973년으로 돌아가고 베니스에서 아내와 휴가 중이던 로버트는 편지를 통해 아내 에마와 친구 제리의 관계를 알게 된다. (로버트) 기대돼? 토르셀로행 말야. 사이. 우리가 토르셀로에 몇 번 갔었나? 두 번이지. 처음 갔을 때 당신이 좋아하던 모습이 기억나는군. 맞아. 무척이나 좋아했었지. 열애하듯. 한 10년 됐나? 아마 우리가 결혼하고 6개월쯤 지난 후였으니까. 당신도 기억나? 내일도 그때만큼 좋아할지 모르겠군. 사이. 제리가 편지를 잘 쓰는 편인가? 에마가 짧게 웃는다. 당신 떨고 있군, 추워? (에마) 아뇨. …(중략)… (로버트) 난 여지껏 제리를 좋아해 왔었어. 솔직히, 당신보다 제리를 더 좋아했지. 어쩌면 내가 제리와 연애 행각을 벌여야 했었는지도 몰라. 침묵. 말해줘, 지금도 토르셀로행이 기대되는지. [6장] 1973년 후반, 베니스 휴가에서 돌아온 에마는 남편 로버트에게 모든 것을 들켰는데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제리와 사랑을 나눈다. [7장] 1973년 후반, 로버트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제리를 만나지만, 둘의 대화는 계속 어긋나게 되고, 제리의 일관된 거짓말에 침묵을 지키고 물러서기로 결심한다. (로버트) 그렇게 보여? 아니면 에마가 감동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제리)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에마 남편은 자네일세. 사이. (로버트) 그래. 맞아. 맞는 말이야. 자네와 논하는게 아니었는데, 그 누구와도 논해선 안 될 일이야. …(중략)… (제리) 에마는 어떻게 지내나? (로버트) 잘 있어. 언제 와서 한잔 하지. 에마가 좋아할 걸세. [8장] 시간은 다시 2년 전인 1971년으로 돌아가고 에마는 제리에게 자신이 아이를 가졌음을 밝힌다. (누구의 아이인지는 에마만이 알고 있다) (에마) 할말이 있어요. 잘 들어야 해요. (제리) 뭔데? (에마) 나 아이 가졌어요. 당신이 미국에 있을 때요. 사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남편 아이에요. 사이. (제리) 아, 그래. 그렇지. 사이. 축하해. [9장] 시간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인 1968년으로 돌아가고, 제리는 친구 로버트의 집에서 그의 아내 에마에게 구애하고, 로버트와 제리는 ‘homo social’한 유대를 맺는다. (제리) 이런 경우가 자네 아내에게 해당된다는 것, 자네 아내의 아름다움이 그렇다는 것이 자네에게도 황홀하지 않은가. (로버트) 맞아, 그래. 제리는 로버트 옆으로 가서 그의 팔꿈치를 잡는다. (제리) 난 자네의 오랜 친구이자 들러리로서 말을 한 거네. (로버트) 그래, 알아. 제리의 어깨를 꼭 쥐었다가 재빨리 뒤돌아서 방을 나간다. 에마도 문으로 가지만 제리에게 팔을 잡혀 그 자리에 선다. 둘은 가만히 서서 서로를 응시한다. 핀터의 작품에서 ‘사이(pause)’는 대화에 리듬을 부여하며, ‘침묵(silence)’은 액션 전개의 의미 있는 경계가 된다. 침묵과 사이를 통하여 핀터는 그의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있는가, 어떤 감정상태인가를 전달하며 작품의 서브텍스트(subtext)를 견고하게 구축한다. 이미지에 익숙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무대 한편에서 칼을 들고 반대편까지 달려가는, 데드 스팟(Dead Spot)이 난무하는 연극 대신, ‘칼-목표물-피’로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영화를 찾는다. 그러나 핀터는 데드 타임(Dead Time), 곧 침묵 속에 이미지 이상의 무엇을 채워 넣는 거부할 수 없는 킬러이며, 이 시대는 그 이름에 압도당했다. QUIZ. 이 작품 속에는 몇 개의 ‘배신’이 숨어있을까요? 정답을 맞추신 분께는 CGV 영화 관람권 두 장을 선물로 드립니다. 민초3기 연세대 l 김다미 1000after@hanmail.net

Thu Oct 20 2005 07:53: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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