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통신원

'맥 끊긴' 大河소설… 왜 더 이상 안 나오나

신영미

젊은 층 '긴 호흡' 참지못하고역사 이야기에 공감대 줄어 작가들도 단편에 힘 쏟아 -조선일보 긴 겨울밤을 앞두고도 두렵지 않았던 건 아랫목에 수북이 쌓아놓고 읽을 대하소설(大河小說)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대한민국 서재 책꽂이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대하소설은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대하소설의 원조(元祖)는 프랑스다. 평론가 앙드레 모루아가 처음 대하소설(roman fleuve)이란 말을 썼다. 내용의 줄거리 전개가 완만하고 등장인물이 복잡하며 사건이 연속으로 중첩되는 게 큰 강의 흐름과 같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1920~30년대 홍명희(洪命熹)의 미완성작 '임꺽정(林巨正)'이 선구자다. 그 뒤 '임진왜란' '자고 가는 저 구름아'(박종화) '지리산' '산하'(이병주) '요하'(김성한) '연개소문'(유현종)이 나왔다. 전통 한학 교육의 세례를 받은 작가들이 유려한 문체로 되살려낸 역사와 옛 문화의 향기는 숱한 독자들을 잠 못 이루게 했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시대를 뛰어넘어 쓰인 박경리(朴景利)의 '토지'는 이 분야의 금자탑이다. 1980년대 들어 '장길산'(황석영) '객주'(김주영) '혼불'(최명희)이 명맥을 이었다. '태백산맥'(조정래)은 한때 대학가의 필독서였다. 1990년대에는 작가가 '내 작품 중 가장 거대한 서사'라고 했던 이문열의 '변경'이 나왔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는 좀처럼 대하소설을 찾기가 어렵다. 김홍신의 '대발해',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 등 몇 편 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제 한국에서 더 이상 대하소설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①'역사 이야기'의 시대는 지나갔다 대하소설이 '역사'에서 소재를 취했다면 지금 40대 초반 이하 작가들은 이런 경향을 벗어났다. 평론가 표정훈씨는 "탈역사화(脫歷史化)된 젊은 세대는 식민지적 억압이나 민중의 비극 같은 무게에 눌려 있지 않다"고 했다. 표씨는 "1990년대 중반 세계화 담론 이후 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문화적 특수성보다는 보편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했다. 소설에서도 같은 시대 다른 지역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화적 소재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설사 역사소설을 쓴다 해도 김별아의 '미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김영하의 '검은 꽃'처럼 한 권으로 끝나는 분량이다. 길게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데다 소재만 역사일 뿐 지극히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담은 것이다. 광복 이후 역사학계에서의 연구 작업이 진전된 것도 대하소설 쇠퇴의 요인이 됐다는 지적이 있다. 역사의 '빈칸'이 많아야 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인데 오히려 그 여지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②작가들의 글쓰기 방법이 달라졌다 최혜실 경희대 국문과 교수는 "요즘 소설들을 보면 마치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대본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잦다"고 말했다. 집필할 때부터 영화나 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쓰는 경우가 많다. 거기서 "역사는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의 더미를 남기며 진행하는 거창한 드라마다. 인생은 그런 희생의 더미를 일일이 따져가며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게 아니다"(이병주 '지리산')는 식의 깊이를 찾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다. "세모시 같은 한가위가 지나고 나면 산기슭에서 먼, 먼 지평선까지 텅 비어버린 들판은 놀을 받고 허무하게 누워 있을 것이다. 마을 뒷산 잡목 숲과 오도마니 홀로 솟은 묏등이 누릿누릿 시들 것이다"(박경리 '토지')는 묘사도 기대하기 힘들다. 최 교수는 "등단을 위한 작품이나 문학지에 실리는 소설들이 대부분 단편이라는 것도 대하소설 쇠퇴의 이유"라고 말했다. 예전처럼 몇 년간 쓸 수 있었던 '신문 연재소설'이라는 틀도 줄어들면서 제도적 장치도 취약해졌다. ③독자들은 긴 이야기를 견디지 못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설의 수요자인 독자들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는 "인터넷 시대의 독자들은 무게감 있게 진행되는 긴 이야기를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긴 호흡의 이야기라도 가볍거나 자극적인 것들은 살아남는다. 장편 판타지가 계속 인기인 것은 이 때문이다. 최혜실 교수는 "판타지 소설은 양은 길지만 예전 대하소설에 비하면 무척 쉽게 쓰이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장원재 전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예전에는 문학이 역사나 이데올로기를 쉽게 전달하는 수단이었고 독자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공부하듯 소설을 읽었지만 이제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요소가 강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 '변경'이 나왔을 때 전문가들은 '이게 마지막 대하소설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했다. 앞으로도 과거 같은 대하소설의 명편(名篇)은 나오기 힘들고 대하소설이 도서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유산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Mon Nov 23 2009 14:24: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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