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다이어리히스테리

정상미

너무 조잡해. 너무 칙칙해. 너무 무거워. 너무 심플해. 너무 난삽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도대체가 너무한 것들 사이에서 궁극의 선과 지상의 미를 갖춘 어떤 것을 찾는다. 아, 오해는 마시라. '최고의 결혼식'이라는 강박에 짓눌린 히스테릭 새신부가 수 천벌째 웨딩드레스를 뒤적이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열망과 바람과 의욕, 혹은 집착과 편집(偏執), 내지는 광기... 이런 것들이 뭉쳐져 뿜어내는 오오라 속으로 한 발 들어가 본다. 성벽같이 탄탄한 겹을 이룬 일군의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2008년 12월 29일 일요일, 종로의 한 대형서점 다이어리 코너. 서점관계자들은 친절하게도 아예 신상 다이어리들을 한데 모아 '다이어리 코너'를 넓게 만들어주었다. 이것만 봐도 매년 이맘때면 '다이어리'가 얼마나 훌륭한 '상품'으로서 활약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한발 안으로 들이밀긴 했지만 그 주위를 세 겹, 네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사람구경에 지칠 지경이다. 누구하나 쉽게 결정을 내리고 계산하지 않아서 사람이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고르고 또 고르고, 보고 또 보고, 내려놨던 다이어리를 다시 집어 들고. 집어든 다이어리를 다시 내려놓고. 열의와 열기가 무섭다. 하지만 불끈, 질 수 없다! 여기서 다이어리라 함은 그 사전적 의미인 '일기'라기 보다는 '스케줄러'에 가깝다. 즉, 2009년이라는 한 해를 열 두 조각으로 썰고, 그 조각들 각각을 4,5등분한 뒤 다시 일곱 쪽으로 저며낸 소책자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의욕적인 녀석들은 때때로의 상념을 담아낼 페이지까지 포함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다 세심한 녀석들은 지하철 노선도나 가계부 페이지까지 들이민다. 아, 입맛에 따라 음식별 열량표나 공연티켓 정리란이 양념처럼 추가된 녀석들도 있다. 여기까지는 기본 뼈대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생김새나 스타일, 즉 디자인에 관한 문제까지 추가되면 상황은 더없이 복잡해진다. 수십종?의 다이어리들이 초조히 선택을 기다리며 쌓여 있고, 그 각각의 것들 위에 샘플용 다이어리가 팔랑거리며 말을 건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와 함께 한 해를 시작해보지 않겠어?" 녀석의 유혹에 넘어가 넙죽 집어 페이지를 넘겨본다. 흠흠흠, 먼슬리는 괜찮은데 위클리가 별로야. 일러스트는 예쁜데 구성이 조잡해. 위클리가 세로로 되어 있음 좋겠는데 가로로 되어 있어. 디자인이 너무 촌스러워. 다 괜찮은데 너무 두껍고 무거워. 강박적인 손놀림들이 오고가고, 또 오고간다. 급히 보고 다른 녀석을 택하고, 내려뒀던 녀석을 다시 찾아 뒤집어 본다. 샘플들은 뒤섞이고 엎어지고, 심지어 격렬한 러브콜들이 쏟아져 너덜너덜해진 녀석들도 있다. 언제부터 다이어리를 구매하는 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하나의 생활양식이 됐을까. 마치 떡국을 끓여먹는 것처럼,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처럼, 금연이나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것처럼. 신년 다이어리를 구매한다는 것은 한해를 계획적이고 생산적으로 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가지는 의미나, 의지의 강도가 다를 수 있다는 위험성을 그냥 감수하고 막말을 일삼아 보자. 당신이 뭐 그리 거창한 ‘대의명분’을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2009년이 오기 전에 2009년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면, 짝짝짝! 축하한다. 당신은 적어도 당신의 시간들을 자력으로 컨트롤하고자 하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알찬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혹은 좀더 막말을 일삼자면, 자기계발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그나마 좀 성공할 수도 있을지도 아닐지도 아닐 리는 없지만 아무튼 그런! 사람이라는 얘기가 된다. 시간을 막 길거리에 갖다버릴 생각은 없는 당신,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새해가 넘어가서야 다이어리를 샀다고? 이런 게으르기는! 하지만 자네도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사람은 아니니 안심하게나. 그나마 당신은 가능성이 있는 축이야. 본디 시간이란 부피도 무게도 길이도, 일체의 사이즈도 갖지 않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마파두부에 넣을 두부 자르듯 질서 정연히 12등분, 4등분, 7등분을 일삼고 그 한 칸 한 칸을 알차게 빼곡히 새카맣게 채워낼 야심을 품게 된 오늘날의 현실은 실상, 갈릴레이가 진자의 원리를 발견하고 이것이 발전되어 기계시계가 등장한 그 무렵 이미 결정지어진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시계의 발명 이후, 인간에게(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산적인’ 즉, ‘쓸모 있는’ 인간에게 라는 점!) 부과된 미션은 구체적인 ‘신체사이즈’를 갖게 된 시간을 정복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시간의 정복은 곧 생산성 있는 삶의 완성을 의미하고 이것은 곧 더 나은 미래와 보다 성공에 한 발짝 가까워 질 가능성을 약속한다. 이러한 사고가 ‘다이어리 구매’라는 방식으로 개개인에게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더없이 맘에 드는 다이어리가 손에 잡히면 더없이 맘에 드는 삶이 손에 잡힐 것 같은 환상’이 보태져 다이어리 구매에 보다 강박적으로 임하도록 몰아세우는 것이 아닐까. 이 환상은 다이어리를 둘러싼 구매자의 더 많은 욕구를 충동질하고, 더욱 다양한 다이어리 준별 기준을 파생시키며, 더욱 다양한 제품의 생산을 촉진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다이어리 코너 관리 직원의 피로도를 높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대한민국 실물경제에도 엄청난 호조를 가져올지 모를 일이다! 다이어라 산업 호황으로 2009년 대한민국 경제성장률 7% 오케이?! 정녕 먼슬리에 일요일이 아닌 월요일부터 인쇄되어 있다는 사실이, 위클리가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라는 사실이, 일러스트가 예쁘다는 사실이, 스케줄을 체크하고 일과를 기억하는 것에, 그토록 갈망하는 ‘생산적인’ 한해, 하루, 일년을 살아내는 것에 그다지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위클리 구성이 완벽했던 나의 2006년 다이어리, 다소 무겁긴 했지만 유명 작가의 일러스트가 심금을 울렸던 나의 2007년 다이어리, 구성과 색감, 가격 및디자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던 나의 2008년 다이어리에게서 들을 수 있다. 또한 디자인이고 구성이고 따질 수 없이 밋밋하기만 했던, 게다가 손수 정성들여 고른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나눠주었던 2005년 학생수첩과 함께 했던 일상이 오히려 더욱 ‘생산적’이었고 더욱 ‘후회가 적었다는’ 경험적 근거 역시 그 답변의 설득력을 높여줄 것이다. 때문에 바쁜 손놀림으로 지상최고의 다이어리를 고르는 와중에도 ‘이토록 열심히 새해 다이어리를 고르는 만큼 과연 이토록 열심히 한 해를 살아가게 될까?’라는 씁쓸한 생각을 완전히 묻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콤한 다이어리와 함께하는 상콤한 새출발’에 대한 환상을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경험이야 우리 이미 익숙하지 않은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항상 ‘출발’이 아닌 ‘새출발’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다이어리 구매는 새해맞이를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가 될 수 있는 것. 이번에야 말로 진짜, 진짜로 이루어질 미래와의 약속! 2009년 12월 30일 월요일 저녁 6시, 전날 과도히 붐비는 인파로 인해 광화문대첩에서 패배한 미래지향적 젊은이 J씨는 격전지를 바꾸어 종각역 지하 대형서점으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평일이었고, 사려 깊은 서점 측의 배려로 다이어리코너가 넓게 꾸려진 덕분에 충분히 고심하고 고민하며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어딘가, 어딘가 있을거야. 정말 손에 착 달라붙는 나만의 다이어리가! 오옷! 전날의 격전까지 포함해 수십 개의 다이어리를 거친 그녀의 손에 최종적으로 남게된 두 개의 다이어리! 이건 디자인도 예쁘고 전반적인 구성도 좋은데, 문제는 위클리 디자인이 너무 난삽해... 이건 위클리가 깔끔하고 날짜도 다 써져있지만, 뭔가 일러스트가 완전히 내 타입은 아냐... 아아, 베스트명단에 오른 든 그 녀석들도 무소불위의 다이어리히스테리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결국 다이어리를 사기는 샀을까? 아니, 더 적절한 질문은 그래, 이것일 것이다. 결국 J의 한 해는 손수 고른 그 다이어리처럼 그토록 깔쌈해질까? 너무 아픈 질문인가? 미안, 내년 이맘때 물어보도록 하지. 쿠쿠쿠쿠! *이미지출처: http://www.babosarang.co.kr/product/product_detail.php?product_no=182024 *헤헴.. 이번 호가제가 마지막으로 머무는'시간이 머무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쓰는 기사라서 제발 이번만은 발로 쓰지 않고 머리와 가슴과 손으로 쓰려 했건만, 역시 잘 되질 않네요=ㅂ=ㅋㅋㅋㅋ아무튼 지금까지 부족한 글을 너그러이 좋게 봐주시고바쁘신중에글이라고도 할 수 없는 썩은 우유를끈기있게참고 마셔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ㅁ//♥

Fri Jan 02 2009 10:17: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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