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정상미

그간의 나_ 혹은 이러한 나_

Sat Nov 01 2008 09:49: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탕국에 넣을무를 빠트렸다는 엄마의 안달에 뚜벅뚜벅 마트엘 갔다. 장정의 팔뚝보다 더 듬직한, 면도를 하다말았는지 얼굴의 절반은 파르라니 한 채로, "안녕? 난 무우라고 해-"라는 녀석을 댈롱 봉투에 우겨넣고산책이 좋아 바람을 폈다. 아? 아니, 바람이 좋아 산책을 했다. 이십년을 넘게살고 자란 동네에. 타향에 나가 있던 삼년세월이 있긴 하지만 쨌든 이 동네는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 여전한 동네, 아, 비록 최근 몇년간 빠리바게뜨도 뚜레주르도 자리를 잡아 반짝반짝 대규모 프랜차이즈의 위용에 힘입곤 있지만,그냥 그렇게, 이러한 동네_ 야! 마트에서 만난 친구는 -국악 피리를 전공으로 삼겠다던 학생회장 오빠네 세탁소 집 뒤에 살던, 가끔 나를 집으로 데려갔던, 우리는언젠가 세탁소 집 아저씨를 욕했었다.- 주말 일일 알바를 하고 있었고, 마트에서 마주쳤다는 동네 친구 몇몇의 이름을 댔다. 몇 년만에 듣는 아이들의 이름은 묵었던 귀지를 파고 안쪽에 가자리를 잡았다. 일년에 한 두 번쯤 나를 끼워주는술친구들의 이름과,지금은 군대에 간짖궂은 녀석들의 이름과,중학교 이학년 때 내게 신화 포스터를 찢어주었던 똘똘이 스머프 같던 아이의 이름, 지금 생각하면 꼭 노홍철 같았던,함께 속셈학원에 다닌 적이 있는남자애의 이름, 주먹질 좀 하고 춤도 좀 추면서몰려다니던 남자애들두엇의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아이들도 여전히 이사가지 않고 여기 살고 나도 여전히 여기 사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만나지질 않을까. 선듯- 익숙한 눈빛과 공중에서 부딪쳤다. 어딘가 표범같은 눈빛. 경기 떡방앗간 집을 돌아 여성회관 앞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주먹질 좀 하고 축구 깨나 하던, 소위 '날라리'혹은 '잘나가는 아이'로 그룹핑되었던,이름은 여자아이 같은데까만 얼굴에 나이키 조끼를 입고, 축구한 뒤 세수한 얼굴을 바람결에 두번 툭툭 흔들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던 아이였다. 마트에서 이 녀석의 이름도 들었던가. 여전히 여기 사는 모양이군. 공중에서 부딪친 대략 1.5초간 인사를 할까 고민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연휴기간, 건너편엔한껏 빼입고 머리를 있는대로 세운녀석, 난 그저분홍색 메이데이 티셔츠에 색깔도 전혀 맞지 않는면치마를 입고 쓰레빠를 질질 끌고 있던 중이었다. 아, 한 손엔 "진로할인마트" 봉다리에 든 무까지.낯이 서지 않았다. 딱히 나에게 큰 의미를 갖는 녀석도 아니었다. 내 라이벌 의식을 자극하던 이도 아니었고, 언제고 한 번가지려 했던 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있던 이는 더더욱아니었다. 그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일 뿐인데, 그냥 싫었다. 전에 알던이와 오랜만에마주치는 순간이 온다. 마주친 순간의모습이 헤어져 있던 시간의 밀도를, 아니, 더 정확히는그간의 나_를 입증하고 마는 것 같아그 순간을 종종 피하고 만다. 오랜만에 마주친 누군가에게는 무언가 더 내노라할만한 나를 내어 놓고 싶다. 그간의 나_란 이러했다고, 그래서이러한 나_가 여기에 있다고. 아이들과 만나지지 않는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까닭일까. 누군가 내얘길 들었는지 저녀석을 주워다가 내 앞에 내려놓았다. 선듯- 연휴에도 정상영업을 한다는 도드람 포크 골목을지나 훼미리마트를 막 돌아섰을 때, 거기에누군가 녀석을 또 주워다 두었다. 우린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동네한바퀴를 돌고 있었던 거다. 녀석은고개 돌려 나를 한번 더 보고는훼미리 마트로 쏙 들어가 버렸고, 나는 그 앞 횡단보도에 어정쩡하게 섰다. 나를 알아봤을까? 유리문 안에서 나를 넘겨다보지나 않을까.허리를 꼿꼿이 펴고"진로할인마트" 봉다리를 몸앞쪽으로 들었다. 뭐 일부러 감춘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 파란불 깜빡일 때 그냥 건널걸. 파란불을기다리며 떠올려보니, 녀석은 한쪽으로 고개가 삐딱하게 기운 내 자세를 제일 먼저 지적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분명 부드러운 방식은 아니었지만. 집에 가는 길에 또와 분식 앞 즈음에서 옆에 제 친구에게 자꾸 내 흉내를 내면서 실컷킥킥 거리고는, "야, 앞으론 그러고 다니지 말어!" 라고 소리를 질렀던. 하지만 내 고개는 여전히 삐딱-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헤어져 있던 시간의 밀도와 그간의 나_를 입증할 필요가 있는 마주침이었다. 하지만,내겐 여전히 내노라하는 나_란있지도 않고, 덕분에자랑스러운 이러한 나_도 없는것이다.부시럭,무 봉다리가 바람에 스치운다. 사실, 녀석의 이러한 나_도 여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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