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통신원

신영미

“친구돼야 정보 주는게 외교가 생리, 한국 외교관들 전문성 부족”

Fri Nov 28 2008 10:09: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친구돼야 정보 주는게 외교가 생리, 한국 외교관들 전문성 부족” - 경향신문 ㆍ김영희 前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대사외무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은 지난해 67.7%, 올해 65.7%를 기록했다. 그러나 재외공관장 가운데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번 국감에서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외교통상부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 정부 출범 이후 임명된 특명전권대사, 대사, 총영사 등 60명을 포함해 모두 152명의 재외공관장 가운데 여성은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올해 한국에 부임한 스티븐스 대사를 비롯, 재외공관장의 30%가 여성인 미국과 비교하면 각계에 부는 ‘여풍당당’이란 구호나 글로벌 시대란 말이 무색해진다. 우리나라 외교사를 통틀어도 여성 대사는 단 3명에 불과했다. 1996년 이인호 주 핀란드대사가 여성 대사 1호가 된 후 최초의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인 김경임씨가 튀니지대사를 역임한 뒤 은퇴했다. 마지막 여성 대사였던 김영희 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대사(59)는 올 9월 임기를 마치자마자 외교통상부에서 물러났다. 외무고시가 아닌 파독 간호보조원 출신이자 쾰른대학 600년 역사상 ‘전공과목을 강의한 최초의 외국인 여성’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독특한 경력의 김영희 전 대사를 만났다. 지난 9월 외교부를 떠났지만 외국에 한국을 더 많이 알리고 싶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알려주고 싶은 열정으로 눈빛이 반짝이는 그는 “정보화시대인 21세기엔 친화력이 뛰어난 여성 외교관이 더욱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독일 파견 간호보조원 출신의 대사-오랜만에 귀국하니 어떤 점이 가장 많이 달라졌던가요.“8년 만에 오니 완전히 촌사람이 된 것 같아요. 모든 게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처리되는 것도 놀랍지만 무얼 하건 주민등록번호를 써야 하고 어딜 가건 ‘몇 살이세요’라고 물어서 갑자기 늙어버린 느낌입니다. 서양에선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사는데 우리 사회는 모든 곳에서 ‘네 나이를 알라!’고 강요하더군요. 반면 거리를 비롯한 문화수준이 높아졌고 관공서나 상점 등의 직원들도 너무 친절해졌어요. 어딜 가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연발해서 황송할 정도예요.”-어린 시절 꿈도 외교관이었나요.“제가 중·고교를 다닐 당시만 해도 여성은 공무원, 의사, 교사 등 특정한 직업 외엔 진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수시로 나라를 옮기며 살아야 하는 외교관은 결혼하고 가족도 보살펴야 하는 여성들에겐 불가능한 직업처럼 여겨졌어요. 전주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 구경조차 못해봤으면서도 막연히 넓은 세상에서 일하고 싶어 학생기록부의 장래희망란에 ‘외교관’이라고 썼는데 그 꿈을 이뤘습니다.”-독일 파견 간호보조원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제가 9남매 중 8번째이자 막내딸입니다. 태어날 무렵엔 가정형편이 넉넉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언니, 오빠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저까지 대학 보낼 형편은 못되었어요.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 중구청에서 일하면서 국제대학교 야간부에 다녔는데 1972년 어느 날 ‘파독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모집’ 공고를 본 것이 제 운명을 바꿨습니다. 어떻게든 독일에 가서 간호보조원으로 돈 벌어 제대로 공부할 생각이었죠. 해외 간호보조원 양성소에서 1년 과정을 마치고 독일로 떠났는데 계약기간 3년 동안 하노버와 함부르크 사이의 윌첸시 시립병원 남자 정형외과 병동에서 근무했습니다. 독일 병원은 보호자와 간병인이 할 일을 간호사와 간호보조원이 다 하는데 제 담당이 대부분 교통사고로 몸을 다친 엄청난 거구의 남성 환자들이어서 그들을 먹이고, 눕히고, 재우고, 재활운동을 시키느라 골병이 들었죠. 병원 일도 힘들지만 야간에 독일어 공부하느라 3~4시간밖에 못자서 한여름에도 스팀을 틀어 몸을 지져야 할 만큼 육체적으로 힘들었어요.”-그렇게 고된 일을 하며 공부는 어떻게 했나요.“독일에 간 목적이 간호사로 성공하는 게 아니라 대학 공부였으니까요. 남들이 힘들다고 거부하는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의 근무를 자원했고, 버스가 오후 6시면 끊어져 자전거를 배워 타고 다니며 독일어, 영어, 불어를 배워 대학에 갈 준비를 했죠. 독일은 학제가 다른 외국학생을 위해 별도의 아비투어(우리나라의 수능에 해당)를 치르게 하는데 제가 1등을 했어요. 그후 대학 입학허가를 받을 때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면 혹시라도 담당자가 안보고 버릴까봐 서류를 들고 원하는 대학마다 직접 찾아가 면담을 했죠. 가장 먼저 입학허가서가 온 곳이 쾰른대학이라 입학신청을 했죠. 그후 하노버, 함부르크 등 원서를 낸 대학 모두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아 매우 행복했어요.”-쾰른대학에서의 전공이 외교학이 아니라 교육학이더군요.“간호보조원 생활을 하며 ‘인간 공부’를 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아프면 인격을 드러내는데 환자들을 통해 책에서도 못배운 인간 심성에 대한 것을 깨우쳤고 환자들에게 상냥하고 싹싹하게 대해주면 그들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법과 제도보다 사람을 공부하고 싶어 교육학을 선택했습니다. 75년 쾰른대학에 들어갔을 때 교육학과 학생 40명 중 저만 외국인이었는데 10학기 만에 학사와 석사과정인 디플로마를 모두 A학점으로 마쳤어요. 독일인들도 평균 6.5년 걸린다는데 5년 만에 마치자 독일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대학에 진학해서도 하루 4시간만 자면서 교육학은 물론 인류학·사회학·철학을 공부했어요.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라틴어와 씨름했고, 86년 2월에 교육학 전공의 철학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예비과정부터 박사학위까지 10년 만에 최단기 코스로 딴 게 더 의미가 깊고 자랑스러웠죠.”- 독일인도 취득하기 어렵다는 독일 박사학위를 쉽게 마친 비결이 있나요.“공부하는 게 의무가 아니라 너무 좋고, 기쁘고, 즐거웠으니까요. 그 어떤 일도 머리 좋거나 부지런한 사람보다 좋아서 하는 사람을 못따라간다잖아요. 간호보조원 때 너무 고생을 해서인지 공부에만 매진하는 것은 오히려 쉬웠어요. 독일어는 어휘가 놀랄 만큼 풍부한데 5분만 대화해 보면 언어 사용에서 그 사람의 수준이 드러나거든요. 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철학에 라틴어까지 공부한 겁니다. 독일은 중·고등학교 시험도 우리나라처럼 4지선다형이 아니라 제목 3개를 주고 1개를 골라 2~4시간 동안 논술처럼 쓰게 합니다. 암기력만 좋아선 안되죠. 유치원에 가보니 선생님이 ‘오늘은 무슨 놀이를 할까’라고 물으면 아이들이 저마다 공놀이, 모래놀이, 블록쌓기 등을 제안하고 의견이 다양하면 다수결로 결정하더군요.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어 떠난 독일에서 제가 평화롭게 대학에 다닐 무렵,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어요. 현장에서 아픔을 나누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더 공부에 집중했어요.”조국을 위해 경험과 인맥을 바치고 싶다 -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독일 통일 직후인 91년 외무부(현 외교통상부)가 독일 전문가 특별채용 공고를 냈어요. 당시 저는 쾰른대 강사였는데 갑자기 어린 시절의 꿈이 되살아나 피가 뜨거워졌어요. 그래서 새로운 삶에 도전했죠. 인사위원회 위원들은 “자유로운 학문을 하던 사람이 제약이 많은 외교관 생활에 적응 못하고 곧 나갈 것 같다”고 우려했지만 “한국은 나를 낳아주고 키워줬다. 독일은 내 정신을 채워줬다. 한국과 독일의 가교가 되고 싶다. 뽑아만 주신다면 나가라고 할 때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 덕분인지 합격했습니다. 91년 2월 국빈 자격으로 방한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의 통역 역할이 제 외교관 생활의 시작이었어요.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현재 아흔살이 넘었는데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낼 만큼 제게 잘해 주세요. 그런데 18년 만에 귀국해서 한국 외무부에 근무하려니 제 시계가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서기관으로 근무했는데 다양한 의견을 내야 할 외무부가 너무 경직된 분위기라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리고 위에서 지시를 내리면 수행하는 것이 관례였어요. 대학에서 자유분방하게 학생들과 토론하던 저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당시 외무부엔 여성외교관이 거의 없을 때라 상의할 여성동료도 없고, 특별채용이라 연수기간도 없어서 어린 사무관에게 배워가며 그저 일만 했죠. 나중에 회식자리에서 보니 잘 떠들고 잘 웃던데 왜 그렇게 사무실에선 입을 닫는지…. 한국 공직사회에는 개인은 없고 직책만 있더군요. 어딜 가건 ‘서울대 출신이냐’ ‘외무고시는 몇기냐’를 묻는데 질렸어요. 그래도 꾹 참고 지내다 1년반 만에 다시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 독일대사관에서는 1등서기관에서 공사까지 역임했는데 유능한 외교관으로 평가를 받았더군요. “제 자랑 같지만 제가 일당백의 실력을 보여주니 상사들이 예뻐할 수밖에 없죠. 시키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일을 해놓고, 시키면 제대로 하니까요. 외국인들과 교류할 때는 한국의 학벌이나 외무고시 몇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만 평가받으니까 상사들만이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제가 필요한 존재라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주요 외교 현안이 있더라도 식사하면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은 5분 정도이고 1시간 이상은 역사, 문화, 책, 음악 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대화를 나눌 때 이야깃거리가 달리면 다시는 안 만나려고 해요. 외교가의 생리가 흥미를 못느끼는 상대에겐 현안이 있을 때만 공식적 면담으로 끝나지만 친구가 되면 속마음을 털어놓고 주요 정보를 주죠. 일단 친구로 인정하면 우리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도와주려 하고, 다른 정보까지 들려 줍니다. 독일에서 근무할 때 다른 나라 외교관이 ‘당신을 만나면 늘 기쁘다. 언제나 배울 게 있으니까’라고 해 참 기뻤어요.”-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할 만한 외교 비사를 들려줄 수 있나요.“우리가 북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차단되어 있을 때 동독은 평양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동독은 평양에 이익대표부란 이름으로 외교관 1명을 파견해 활동 보고서를 쓰게 했는데 저와 친한 독일 외무성의 한 책임자가 독일 외무성에 들렀을 때 “한 번 읽어 보라”며 자료를 주더군요. 3급 비밀이라 그곳에서 눈으로 확인만 하는 수준이었지요. 하지만 나중에 평양에서 근무하던 동독 출신의 외교관이 본국으로 휴가왔을 때 절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2시간 동안 점심을 먹으며 ‘보고서 다 읽었다. 솔직히 얘기해다오’라고 했더니 이런저런 정보를 주더군요. 수집한 북한 정보를 다양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내놓았고, 외교부에서 최우수 보고서로 선정되어 상도 받았습니다.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가 6·25 때 참전한 것으로 추측되는 미군이 북한에 생존해 현지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만난 외교관이 어느날 평양 거리를 걷는데 미국인으로 보이는 3명이 지나가기에 “당신들 미국인이죠”라고 물으니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묵묵히 걸어가더란 이야기를 전해줬어요. 그 정보만 보내고 잊고 있었는데 2004년 뉴스위크지에서 북한에 생존한 미군 출신 젠킨스의 인터뷰를 실었더군요. 읽어보니, ‘왜 당신 조국에서 당신을 구출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란 질문에 그는 ‘미국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96년에야 알았다’고 답했더군요. 제가 보고서를 쓸 무렵과 일치해서 혹시 그 미군이 젠킨스가 아닌가 막연하게 추측을 했습니다.”- 외국인, 더구나 비밀을 엄수해야 할 외교관을 친구로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나 봅니다.“외교관도 신문기자와 비슷해요. 근무시간도 따로 없고, 정보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취재원들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취재원을 보호해줘야 하죠. 공식적 자리만이 아니라 리셉션, 파티에서 만났을 때 그들과 똑같은 수준의 고급 독일어를 쓰는 것은 기본이고요. 특히 제 경우는 전형적인 동양 외모, 상냥한 성격 등도 그들에게 호감을 준 것 같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이야기하면 무뚝뚝한 독일인도 입을 열더군요.”한국을 알리는 것이 대사의 역할- 그런데 왜 우리나라 외교관들은 해외무대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요.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의 하드웨어는 선진국 수준인데 소프트웨어는 아직 멀었어요. 완벽한 전문성으로 무장된 외국 외교관들과 비전문적인데다 언어도 달리는 사람들이 협상무대에 서면 결과가 뻔하지 않나요. 독일에서 살면서 놀란 것은 전 국민이 전문가란 겁니다. 청소부도 직업학교에 다니면서 생물, 화학, 인체에 대해 배워야 해요. 독일 사회가 겉으로 보기엔 참 답답해 보여도 전문가들이 이끌어가기에 제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해요. 외국의 경우 유럽 대사들은 영어, 불어, 독어는 기본이고 다른 나라에 부임하기 전에 그 나라의 언어를 미리 배워두고 갑니다. 또 대사의 경우 3~4번은 대사 경험이 있는 노련한 외교전문가들인데 우리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는 경우가 많더군요.”- 2005년 9월 ‘유럽의 화약고’란 발칸반도에서도 가장 정세가 불안한 세르비아 대사로 발령받았을 때 두렵지 않았나요.“제가 처음엔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로 부임했지만 몬테네그로가 독립하면서 세르비아 대사가 됐고, 최근엔 종교분쟁 지역인 코소보가 세르비아에서 독립할 정도로 제 부임지는 격동의 현장이었죠. 하지만 부름을 받으면 어디든 달려가는 게 외교관입니다. 더구나 꿈꾸던 대사가 되었는데 위험을 따질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해야 할까가 더 걱정이었죠.” - 대사 재임 중 현지에서 유난히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데요.“세르비아에 부임한 유일한 아시아 여성대사란 희소성도 있지만 제가 부지런히 세르비아어를 배워 취임 3개월 후부터는 모든 공식석상의 연설을 세르비아어로 했거든요. 발음이 너무 어려워 가정교사를 불러 수백번 읽으면서 액센트, 숨 쉬는 것, 발음까지 다 지도받았습니다. 처음 주목받은 것은 코이카에서 지원받은 컴퓨터를 각 학교에 직접 가서 전달해줬을 때입니다. 세르비아어로 ‘한국도 어려운 때가 있었고 원조를 받았다. 국민 수준이 높은 세르비아는 곧 원조를 해주는 나라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더니 다들 감동하더군요. 대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 나라에 한국을 제대로 알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겁니다. 국기원 시범단을 초청해 대사배 태권도대회를 열었더니 텔레비전에서 12번이나 방영했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에 관한 에세이 콘테스트였습니다.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출신들이 많아 교육수준도 높은데 지역마다 영재센터를 운영합니다. 본부가 있는 베오그라드를 비롯, 지방에 있는 영재센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관련 에세이를 공모해 30명에게 한국산 컴퓨터를 주는 행사였죠. 지방별로 2명씩 뽑았더니 시상식날 전국 수상자의 온가족이 다 올라왔더군요. 세르비아 영재들이 인터넷이나 자료를 통해 한국을 공부하고 알게 되고, 또 한국산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한국팬이 되었죠. 몇몇은 한국에 유학가고 싶다는 말도 했어요. 3년 동안 고위관료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많은 이들을 만나 한국을 알리는 씨를 뿌리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과 결혼한 첫 여성 대사이기도 한데요.“남편인 조지 헤서넌(미국 세인트어거스틴칼리지 철학과 교수)은 독일 유학시절에 만났어요. 78년에 처음 만나 다음해 제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고, 14년이 지난 93년에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철학자대회에도 참석했고 된장국과 김치를 즐기는 한국통이에요. 철학 공부를 위해 독신으로 살겠다는 그를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했고 서로의 직업을 존중해 남편은 미국에서 일합니다. 그래도 영어 연설문 교정, 정세 브리핑은 물론 신간 외교서적을 모조리 구입해 보내주는 등 외조를 아끼지 않아요. 제가 대사 이임후 한국에 오니 다들 ‘왜 남편이 사는 미국에 안가냐’고 묻는데 저는 모국에서 할 일이 있고 그는 자기직업에 충실하다는 걸 왜 모를까요.”-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외교관, 특히 대사들의 생활은 리셉션 참석이나 파티 주최가 많던데 아내의 내조를 받는 남성 대사와 달라서 힘든 점도 많았을 것 같군요.“1인2역을 하자니 힘들었죠. 어떤 날은 공식회의, 칵테일 파티, 만찬 등이 있어 하루에 옷을 3번 갈아 입을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또 유난히 인기가 많아 초대받는 곳도 많은데 다들 아는 분들이라 의상에도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또 우리가 파티를 주최할 때는 음식이나 데코레이션도 품격있고 한국 분위기로 해야 해서 메뉴며 꽃꽂이까지 다 챙겼죠. 휴일에도 쉬지 않고 모자를 눌러쓰고 베오그라드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민심도 살피고 개성있는 옷을 만드는 양장점, 싸고 싱싱한 꽃을 파는 곳을 찾아냈어요. 좋은 원단으로 세련된 디자인의 옷을 싸게 맞춰 입으니 외교관들이 ‘당신은 옷이 대체 몇벌이냐’며 놀라기도 했죠. 꽃도 플라워 아티스트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라 직접 꽂았는데 다들 좋아했어요. 대사관저는 그저 대사 가족들이 머무르는 숙소가 아니라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데려다 기죽이는 곳이기도 해요.”-이제 외교부에선 퇴임했는데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외교부 정년이 60세인데, 저는 59세지만 별정직인데다 보직을 받지 못해 대사에서 퇴임하자마자 물러났습니다.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줄 알고 행복하게 일했는데 정작 제 앞날은 생각 못했더군요. 어느 나라에서도 강의를 할 수 있지만 제가 배우고 체험한 산 지식이 너무 아까워요. 우리나라가 통일을 앞두고 있는데 독일의 통일을 목격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독립 등을 현장에서 지켜본 경험, 그리고 수십년간 맺어온 인간관계들을 활용해서 대한민국을 위해 기여하고 싶습니다. 누가 절 좀 활용해줬으면 좋겠어요.”김영희는 누구인가72년 파독 간호보조원 출신…쾰른大 전공과목 강의한 최초 외국여성 1949년 전주에서 9남매 중 8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전주여고 졸업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 서울 중구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1972년 독일 파견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생활을 시작. 3년간 정형외과 병동에서 거구의 남성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공부에 매진, 야간대학에서 어학공부를 하고 쾰른대 대학예비과정을 거쳐 75년 쾰른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선 교육철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을 공부했으며 86년 교육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쾰른대학 600년 역사에서 ‘전공과목을 강의한 최초의 외국인 여성’으로 인정받으며 베를린 천도의 역사적·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독일의 상징 베를린’ 등의 논문들을 냈다. 독일 통일 직후인 91년 별정직으로 당시 외무부에 특별채용돼 주독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했다. 2005년 9월 세르비아대사로 임명되었을 때 외교부 당국자는 “세르비아를 포함한 발칸제국의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에 대해 외교부 내에서 누구보다 해박한 인물”이라고 그의 전문성을 평가했다.독일 유학 중 만난 남편 조지 헤서넌 교수와는 학문의 동반자이자 서로 존중하는 사이. 엄격한 철학교수인 부군은 귀여운 곰인형이 그려진 카드에 사랑의 말과 자신의 철학세계를 담아 보낸다고 자랑한다. 독일 전문가로서 통일과 분단에 관한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그의 바람은 자신의 풍부한 경험과 인맥을 활용해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것이다.<유인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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