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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미

중년, 안부를 묻는 세 가지 법

Sun Oct 12 2008 12:29: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중년, 안부를 묻는 세 가지 법 / 박범신 -한겨레신문 수십 년 만에 만난 늙수그레한 동창생 친구가 묻는다. “어디 사냐.” “응, 세검정.” “개인주택이냐, 아파트냐.” “주택이야.” “몇 평인데?” “응, 뭐 #평 ….” “거기 요즘 평당 천만원쯤 가냐?” “아마도.” 말은 그쯤에서 끊어진다. 오랜만에 만난 또 다른 친구가 안부를 묻는다. “애들이 셋이랬지? 뭐하고들 사냐?” “뭐 큰놈은 연극쟁이고 딸년은 디자인을 전공해서 ….” “사위는?” “회사원이지.” 친구는 마음이 놓인 얼굴로 “우리 큰놈은 사법연수생인데, 요즘 판검사 되기도 어렵고 처음부터 변호사로 나앉자니 전관예우 혜택도 못 볼 거고, 걱정이 태산이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지만 느긋한 눈빛이라 나는 토를 달지 않는다. 역시 또 수십 년 만에 만난 다른 친구가 묻는 안부. “어디 아픈 데는 없냐?” “뭐, 그럭저럭 ….” “다행이다. 난 허리가 좀 안 좋았는데 수영과 골프로 고쳤어. 홍삼 먹어라.” “홍삼은 왜?” “소양인이라면 홍삼보다 ##이 나을라나.” 친구의 입에서 생전 들어보지 못한 건강식품 이름들이 줄줄이 엮여 나와 나는 기가 질려 또 입을 다문다. 나는 ‘부동산’으로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에겐 내가 어떤 꽃나무를 좋아하고 우리집 좁은 뜰에 무엇무엇을 심었으며, 그 중의 무슨무슨 나무가 시름시름해 요즘 고민이라는 말을 털어놓고 싶고, ‘자식’으로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에겐 큰애가 연출한 연극작품들의 경향에 대해 토론하고 싶고, ‘건강’으로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에겐 삶의 유한성이 주는 우리 세대의 존재론적 강박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상의하고 싶지만, 기회는 번번이 무산된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친구가 안부를 물어올 때 요구하는 것은 모두 나에 대한 몇몇 단순 정보에 한정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눕는다. 나이 먹으면 친구들과 만나 우의를 나누는 것이 최고의 낙이라 배웠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삶의 유한성으로 내몰리는 노년을 어찌 보낼지 앞이 캄캄하다. 예전엔 만나기만 하면 며칠 밤을 꼬박 세워도 할 말이 차고 넘치던 친구들인데, 아무리 세월이 무섭다 하지만 어떻게 이리도 뚫고 들어가 소통할 말이 없단 말인가? 하기야 뭐 친구들만 그런 게 아니다. 가족들과도 때론 말문이 막히고 이웃들은 만나도 잘 나가야 신문가십성 대화 정도에 맴돌기 일쑤이고, 심지어 동료 작가들을 만날 때도 개그맨들 잡담하듯 말허리를 서로 잇고 거짓말 반 참말 반으로 웃다가 끊어진 다리 같은, 처치 곤란한 어색한 침묵과 맞닥뜨린다. 문학 얘기는 금기어가 된 지 오래다. 그런 날 역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헛헛하기 이를 데 없어 발이 꼭 허방을 짚은 것 같다. 차라리 모스 부호를 두드리고 싶다. 사실이다. 자주자주 당신들보다 우주가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사람들을 만나서 뻔한 개그에 의례적으로 웃고 실질에 도움도 안 되는 몇몇 정보를 주고받는 체 하다가 잔뜩 지쳐서 돌아오면 나는 깊은 밤 혼자 앉아 우주를 향해 나의 상처와 고독과 남은 꿈에 대해 모스 부호를 보낸다. 이 글도 내가 우주로 보낸 모스 부호들 중 일부다. 가까이 있는 당신이 너무도 그립지만 이 세상의 말들은 이미 정보에 점령당해 그 빛을 잃었으므로 차라리 우주의 어느 별을 중계 삼아 당신에게 ‘쓰리쿠션’으로 보내는 모스 부호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자본과 기민한 정보에 ‘말’이 모두 흡수되고만 세상을 생각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말’이 본질과 현상, 안과 밖, 꿈과 실제, 너와 나를 잇던 ‘전설의 시대’가 너무도 그리운 이 가을이, 지금 창 밖에서 속절없이 침몰하는 중이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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