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생 세상만사

삼국지연의 시리즈1 - 유비, 이 양반 보통아니네?

신동민

삼국지연의 시리즈1 - 유비, 이 양반 보통아니네? 영화 ‘용의 부활’,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 등을 통해 2008년 다시 재조명 되고 있는 장편 역사소설 삼국지연의. 영화뿐만 아니라 매일 서점 곳곳에는 삼국지 관련 처세서, 분석서 등이 쏟아진다. 이처럼 약 2000여년 전 중국대륙의 뜨거운 이야기가 비단 본토뿐만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연의의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끼고 교훈을 얻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영원한 한국인의 스테디셀러 삼국지연의. ‘삼국지를 10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만들어낸 삼국지연의. 도대체 삼국지연의가 무엇이길래 이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 2008년 하반기 세상만사 코너에서는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조금은 무시무시한 사람이 되보기 위해 나관중 저, 소설 ‘삼국지연의’의 이모저모를 논해본다. 그 시리즈의 첫 번째로, 삼국지연의의 논란 많은 영원한 주인공, 유비를 다루어보자. 유비, 쪼다 아니야? 위의 조조, 오의 손권과 삼국지 한축을 이루는 유비만큼 읽는 사람마다 평가가 엇갈리는 삼국지연의의 주인공도 없다. 일찍이 ‘소설이 아닌 삼국지’를 펴낸 서울대 정치학과 최명교수는 그래도 한 국가를 세운 유비를 “쪼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셨으니까. 아닌 것도 아닌 것이 유비만큼 ‘쪼다’스러운 인물도 삼국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그 아비가 환관출신이었다고 해도, 조조는 젊어서부터 한 조정 중앙에서 활약했었다. 손권 역시도 강동의 명문가 출신. 그러나 유비는 비록 한 중산정왕의 후손이라고는 하나 이 역시도 확인된 정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왕가의 후손이라면 왜 나이 25살이 다 되도록 누상촌 촌구석에서 돗자리나 짜고 있었던가. 유비의 능력도 의심스러운 측면이 많다. 신야 융중에서 제갈공명을 만나기 전까지 다른 인물들이 “한 몫” 잡고 있을 때 세상에 나온 20여년 간을 확고한 기반 없이 지내야 했다. 그것뿐인가? 서주에서 여포와 싸울 때, 형주에서 조조군에 쫓길 때에는 부인과 식솔을 두 번이나 버리고 도망가기도 했다. 일찍이 공자가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였는데, 유비에게는 修身 여부도, 齊家 여부도 조조와 손권 만큼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것이다. 유비, 善의 대명사? 惡의 함축? 중국 한족이 사실상 몽고족 지배하에 있던 원나라 때 기술되었기 때문인지, 삼국지연의는 전반적으로 한나라의 후예 유비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논조를 취하고 있다. 쉽게 말해 유비는 쓰러져 가는 한나라를 지지하기 위해 나타난 정의의 사도지만, 한나라의 왕위를 찬탈하려한 조조는 악인이라는 것이다. 양양에서 조조군에 쫓기면서도 수천명의 백성과 함께 피난을 가며 유비가 한 말이라는 “백성이 나를 버릴지언정 나는 백성을 버릴 수 없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은 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삼국지를 뒤집어 보면 유비만큼 잔인한 권모술수에 능했던 자도 없다. 서주에서는 시쳇말로 뒤통수를 쳐 함께 지냈던 여포를 백문루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으며,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 같은 척 했던 조조에게서는 군사 5만을 얻어 달아난다. 원소에 가담했다가 동생 관우의 생사를 확인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으며, 종친의 예를 내세우는 척하면서 결국에는 익주의 유장을 거꾸러뜨렸다. 그 뿐인가? 중산정왕의 후손이라는 명분을 활용, 스스로를 쓰러져가는 한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로 스스로를 이미지 메이킹 하는데 성공했다. 조조와 기타무리들과 자신을 차별화했던 것이다. 유비, 정치의 대가? 유비의 무서움은 바로 이런 무시무시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하로부터, 백성으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정치적으로는 충분히 지탄받을 짓을 했으면서도, 역으로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정의의 정치인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 한국정치에는 보이지 않는 인물형이었다는 것이다. 기재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20대 중반 약관의 선비를 40이 넘은 사람이 세 번이나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의형제 장비와 관우에게는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듯한 형제의 정을 보였다. 장판교 싸움 뒤에는 자신의 아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자기 부하 조운의 생사를 걱정했다. 조조의 보이지 않는 창살아래 있던 허도시절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없는 양 농사를 짓고 유유자적했다. 조조와 술 한 잔 하는 자리에서는 조조의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풀고자 왕년에 황건적 수만 명을 소탕했던 자가 천둥 번개에 놀라 벌벌벌 떠는 겁쟁이 연기까지 선보였다. 정치적 대가로서 유비의 저력은 바로 이 장면에서 나온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존심과 허레허식을 모두 버릴 줄 알았다. 아랫사람에게는 모든 사랑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목적에 정당성을 부여할 줄 알았다. 어쩌면 젊어서 누상촌 저자거리를 활보했던, 미천한 그 경험이 유비의 저력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명문가의 자제라면, 온실 속의 엘리트라면 이는 결코 취할 수 없는 태도들이니까. 유비, 필요한 인물인가? 그 객관적 행보를 볼 때, 유비는 오늘날 정치로 치면, 당적을 수시로 바꾸고, 자기를 키워주었던 정치적 동지와 대부에 칼을 겨눴던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정의의 편에 자리매김하였으며, 낮은 자세로 부하와 국민을 섬길 줄 아는 정치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수많은 물음표가 던져지고 있는 2008년 한국. 유비와 같은 인물이 적절한지, 필요한지는 삼국지연의를 읽어본, 읽고 있는, 그리고 읽을 생각을 하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졸업생l신동민 stoocom@nate.comstoocom@nate.com

Sun Aug 24 2008 03:23: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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