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통신원

신영미

파격적 월급 받으며 요정에서 육수도 끓였지요

Thu Jun 05 2008 02:34: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50년 넘게 ‘평양냉면의 장인’으로 한 길 걸어온김태원의 인생과 노하우 “개인적인 생각으론 섭생의 변화가 왕조, 심지어 종교의 변화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세계대전만 하더라도 통조림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 (중략) … 그런데도 음식의 중요성이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는 건 희한한 노릇이다. 정치인과 시인과 주교의 동상은 곳곳에 서 있는 반면, 요리사나 베이컨 숙성 전문가, 채소 재배 농부의 동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징집 도피… 무작정 상경… 주방장의 매질 <동물농장>을 쓴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37년 저술한 르포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오웰의 비유법을 빌린다면, 한국에서 냉면 장인의 동상을 찾아볼 수 없는 건 희한한 노릇이다. 여름날 더위에 지친 민중들을 누구보다 핍진하게 달래준 건 정치인도, 기업인도, 기자도 아닌 냉면 한 그릇일 게다. 그래서 는 지난달 22일 평양냉면 특집기사에 이어, 50년 넘게 평양냉면을 만들어 온 ‘장인’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김태원(70) 벽제갈비 조리부 실장(현재 봉피양 방이점 근무중)의 삶 속에는 음식·삶·역사가 함께 발효돼 있었다. 그에게는 실장이라는 정식 직함보다 ‘장인’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 1952년 여름밤 을지로4가의 한 처마 밑에서 좁은 어깨의 소년이 소나기를 피하고 있다. 비에 젖은 누더기 옷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소년의 등 뒤에서 끼익, 창문이 열렸다. 소년은 흠칫 놀랐으나 빠끔히 고개를 내민 중년 여성의 선한 눈빛에 겨우 경계를 푼다. 중년 여성은 징집을 피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는 소년을 딱하게 여겼다. 그날 밤 찬밥을 허겁지겁 욱여넣던 소년은 중년 여성의 소개로 며칠 뒤 ‘우래옥’ 주방에서 주방장의 불호령을 처음 들었다. 김태원 장인의 ‘냉면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충청도 옥산이 고향인 김 장인은 평양냉면은커녕 냉면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다. 한국전쟁에서 형 셋을 모두 잃은 뒤 김 장인은 ‘나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징집을 피해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교착상태인 전선에 끌려가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용산역에서 미군 헌병의 검문에 걸려 붙들렸으나 사흘 뒤 몰래 빠져나왔다. 우연히 비를 피하던 집의 주인은 경찰 치안국 감찰부장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김 장인은 당시 곰탕으로 유명했던 ‘우래옥’ 주방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거제도에서 풀려난 반공포로 3명이 동료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석방된 반공포로에게 사회 적응의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식당에 보냈다. 그날부터 김 장인의 이마에는 주방장의 매질에 혹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김 장인에게 평양냉면의 모든 것을 전수한 주병현 주방장은 장신에 어마어마한 덩치의 사나이였다. 국수틀을 밟는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국수를 말릴 때 사용하는 대나무대가 이마에 떨어졌다. 50년대의 주방에는 변변한 세제도 없어, 손님 몇 사람이 냉면을 먹고 나가면 빨랫비누로 냉면 그릇을 닦아야 했다. 수세미도 없어 풀뿌리를 말려 만든 수세미로 그릇을 박박 닦았으나, 기름때는 쉬 사라지지 않았다. 평양이 고향인 주병현 주방장의 평양냉면은 인기가 많았다. 김 장인은 “손님이 많아서 하루 종일 육수를 끓여야 했다. 당시 하루 380초롱까지 끓여 봤다”고 말했다. 당시 한 초롱(석유나 물 따위의 액체를 담는 데 쓰는 양철로 만든 통)을 끓이면 평양냉면 30그릇이 나왔다. 매일 새벽 네 시께 주방장이 발밑에서 잠든 김 장인을 툭툭 건드리면, 김 장인은 졸리는 눈을 비비며 장작불을 때웠다.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김 장인은 주방장이 일러준 냉면 육수 비법을 외우고 외웠다. 호랑이 같던 주병현 주방장은 60년대 중반 주방에서 평양냉면에 고명을 얹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숨졌다. 여자문제로 칼부림 끝에 사라진 동료들 불가피하게 병역기피자가 돼 주방을 벗어나지 못하던 김 장인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61년 군에 입대해 ‘양지’로 나왔다. 주 주방장이 쓰러지고 난 60년대 중반부터 김 장인이 주방을 책임졌다. 같이 평양냉면을 배웠던 반공포로 3명은 휴전 직후 식당을 뛰쳐나가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된 상태였다. 이들 반공포로들은 한 여성을 두고 싸움을 벌이다 53년 여름밤 결국 칼부림을 벌인 뒤 사라졌다. 주방의 총책임자가 된 김 장인은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다. 매일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냉장고가 귀하던 60년대 평양냉면을 시원하게 만드는 일은 전쟁과 같았다. 겨우내 한강에서 떼어낸 얼음은 서빙고에 보관된다. 김 장인은 여름이 되면 매일 서빙고에서 얼음을 떼다 파는 업자에게서 얼음을 구입했다. 냉면에 올릴 편육을 차갑게 만드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주방에는 냉장고 대용의 커다란 궤짝이 있었다. 김 장인은 일단 담배를 마는 데 사용하는 종이에 쇠고기 편육을 돌돌 말았다. 서빙고에서 사온 얼음덩이를 궤짝 밑에 깔고 그 위에 종이에 만 고기를 올렸다. “냉장고를 처음 사용한 70년대 후반까지 ‘하꼬짝’(궤짝)을 냉장고로 썼다”고 말하며 김 장인은 웃었다. 당시 서울에서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만드는 곳은 고려정·한일관·조선옥·우래옥·서래관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김 장인의 명성이 사대문 안에서 서서히 퍼져갔다. 80년대 초반 대원각의 이경자 사장이 당시 파격적인 월급 50만원을 제시했다. 서울 성북동 대원각은 당시 최고급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겨레> 89년 9월3일치 2면을 보면 대원각 이경자 사장은 88년 전국 소득 순위 7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73위였다. 김 장인은 밀실정치가 이뤄지던 독재의 뒤편에서 묵묵히 평양냉면을 만들었다. 김 장인을 스카우트한 뒤 평양냉면으로도 명성을 떨치던 대원각은 이 사장의 불법 행위로 된서리를 맞는다. 이 사장은 91년 12월 여종업원에게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성매매를 시키고 받은 돈을 가로챈 혐의(윤락행위 등 방지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 강력부에 구속됐다. 대원각은 절 길상사로 다시 태어났다. “처음 우린 육수와 두번째 육수를 섞어봐” 그는 대원각 시절을 ‘보따리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요정 아가씨들이 월급 밀린 걸 안 준다고 대원각 앞에 죄다 보따리를 싸들고 나오니, 이경자 사장이 파자마 바람으로 뛰쳐나와 밀린 월급을 줘서 겨우 말리더라구.” 그는 칠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직접 육수를 만든다. 올해로 10년째 일하는 봉피양 방이점에서 후계자도 찾았다. 김 장인에게 육수의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푸근한 웃음을 터뜨리며 김 장인은 못 이기는 척 한 가지를 귀띔해 줬다. “쇠고기 등 재료를 넣고 오래 끓이면 물이 증발되잖아. 그래서 나는 중간에 한 시간쯤 되면 육수를 퍼내고 물을 다시 넣어서 우린다. 그러고 나서 처음 우린 육수와 두 번째 우린 육수를 적절히 섞는 거야. 이게 어려워. 평범한 냉면집은 그냥 끓이다 육수가 졸아들면 거기다 물을 넣고 다시 짠맛을 내기 위해 간장을 넣어. 반면 나는 물 한 방울 쓰지 않아.” 그는 이 시대의 장인이었다. (* 봉피양 강남역본점 : (02)587-7018) -한겨레 신문. 글 고나무 기자 **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요. 공모전을 올리는게문득 식상해져서 나름 좋았던 기사들을 올리고 있어요. 참 신기하죠. 예전에, 일흔이 가까우신 교수님 강의를 들으며신기했던게, 모든 말이 인생의 진리 같고, 삶 자체에 우리 역사가 녹아져있구나 란 사실이었는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도 그때 그 느낌이 전해졌어요. 우리도, 그분들 나이가 되면 그럴까요. 우리 삶에도, 그리고말에도, 역사가, 진리가. 녹아들게 될까요. 여름이 코앞인데 따듯한 차를 찾게 되는 날씨네요. 이런 엉뚱한 날씨, 저는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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