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꼰대는 싫어

정상미

흰 날개를 열어젖힌 물새들이 물 위를 찰방찰방 걷는다. 자전거 바퀴 따라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모습, 뒤에 오는 이에게 나는 외치-“왼편의 물 위를 봐. 저 새 좀 봐. 예쁘지? 하얀 것 좀 봐. 신기하지?”-려다 그냥 입을 닫는다. 푸른 바람이 달게 난다. “나는, 젊은이들이 와서 먼저 묻기 전까지는 절대로 어떤 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게 나이가 먹어도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이죠. 아, 지금도 물어보시니까 대답하는 겁니다.” 조영남씨가 어느 TV프로그램에 나와서 했던 말이다. 잠시 고개를 끄덕, 하곤 그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나이를 먹는다. 집어삼킨 나이만큼 무언가 휘황찬란한, 남들에게 모두 대단하다 인정받을 만한 ‘성취물’이라는 이름의 어떤 것은 갖질 못한 빈손이다. ‘스물셋’이라는 나이는 강타의 ‘스물셋’과는 판이하게 다른 어떤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꿔버릴 나’는 온데 간데 없고 ‘빈방에 주저앉아 손톱으로 곰팡이 슨 벽을 긁고 있는 룸펜’만이 있다. 저이가 내가 아니라면 좋겠는데. 아, 참고로 스물셋 강타는 서른이 되어 군대엘 갔다. 그래도 그에게는 ‘서른 즈음에’라는 김광석의 노래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운운. 허나 ‘성취물’이라는 멋진 이름의 건축물 따위 하나 갖지 못해도, 먹은 나이는 나이값을 하려고 드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샌가 내가 먼저 겪었던 것을 지금 새롭게 겪고 있는 사람들이 눈앞에 쌓여간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빠졌던 오류에 다시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만다. “아냐 그게 아니구! 이건 말야,…” 운을 떼려는 찰라 그냥 입을 닫는다. 대신, “악!”하고 외마디 외침을 목구멍으로 집어 삼킨다. ‘꼰대’가 되기 싫어서. 거드름을 피우면서 너절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얘기를 쏟아내느라 한껏 고무되고 싶지 않아서, 그딴 식의 마스터베이션 따위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솔직히 나는 꼰대들을 좋아했다. 더 정확히는 꼰대들에게 압도되는 경험을 기꺼워했다. 그리고 빨리 저 꼰대들처럼 무럭무럭 자나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두 주먹 불끈 쥐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 원치 않는 교통정리까지 해주려 드는 모습이 혹은 검지 않은 것을 검다고 희지 않은 것을 희다는 오류를 범하면서까지 자신만의 번역을 무수히 쏟아내는 모습들을 보면서 지쳐 나가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 새로 겪는 일 앞에 동그랗게 눈을 굴리는 이들 앞에서 나는 입을 닫고 얌전한 웃음만을 흘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내가 뭔데. 대체 내가 뭐라고. 내 자전거 뒤에 오는 이에게 물새를 보라고 외치다 말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내가 겪은 저것을 뒤에 오는 이에게 꼭 보여주리라 '챙겨주려는' 행위는 실상 '먼저 가는 이'라는 작자들의 오만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내 그는 내가 저것을 보면서 지나쳤던 그 순간에 내가 보지 못했던 남방제비나비나 물가에 부서지는 석양을 보고는 더 즐거이 침을 삼키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또한 여기에는 자신에 대한 겸손 이외에 ‘올바르고 싶은’ 욕망도 숨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꼰대’가 아닌 ‘괜찮은 선배’이고자 하는 마음, ‘착하게 웃는 친절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 정치적 올바름의 활시위 앞에 자신의 무고함을 광화문 네 거리에서 외쳐대고 싶은 건지. 뭐가 뭔지. 그리고 정작 해 줄 말은 또 얼마나 많은 건지. 꼰대는 절대악인가. 혹은 필요악인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거창하게 이름붙이고 싶지 않고 이름 붙일 껀덕지도 없지만, 경험한 것들을 또한 무화시키고 싶지 않고 무화되지도 않는다. 이렇다 할 성취물 하나 갖지 못한 눈이지만 그래도 지금 아동바동하는 이와는 다른 렌즈를 갖고 있어서 다른 어떤 것들이 눈에 잡힌다면, 최소한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눈에 잡힌 것들을 말해주고 그들에게 자원이 되어주길 바랄 뿐인 것. 그런 것. 그래 그런 것인 게다.젠틀하려는 누군가의 욕망보다는, 한창 불타오른 꼰대의 잔소리에서더 많은 진실성과 따스함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먼 옛날 꼰대마니아인 나조차도 혀를 내두르게 했던 그 사람의 말도 어쩌면 그래, 이런 마음에서 우러난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열 두 걸음 양보해, 꼰대를 절대악의 위치에서 필요악의 위치, 혹은 더 좋은 말로 가끔은 필요한 마물의 위치에 두기로 했다면, 꼰대 중에서도 좀 괜찮은 꼰대가 됐으면 좋겠다. 좀 더 쓸만한 꼰대가 된다면 좋겠다. 역시 ‘격조 있는 꼰대’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하기’보다는 ‘지켜봐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또한 자기가 뱉어낸 말 보다 그/녀에게 더 많은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필수요건이다. ‘마스터베이션 전문 꼰대’에서 벗어날 묘책은 이것이 아닐까. 위축되었던 꼰대여, 긴장의 끈을 놓지 말기를.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여기, ‘말걸기의 메커니즘’에도 있다. 당신이 아무리 큰 소리로 장황하게 떠든다 해도, 혹은 당신의 말의 유효성이 꽤나 높은 수치를 자랑한다고 해도, 타인에게 말걸기는 언제나 나의 날숨에서 시작되어 언제나 그/녀의 붕괴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 그것이 ‘붕괴’가 아니라도 좋다. ‘동요’ 혹은 ‘균열’이라도, ‘미동’이라도 그 무엇이라도 좋다. 그래야 제대로 된 '말걸기'가 되고야 만다. 따라서 당신이 무엇을 쏟아 내건 ‘말걸기’는 거기서 곧장 끝난 채 파급력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결국, 꼰대로서 당신의 격조는 청자의 균열여부 혹은 균열 정도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만다. 그/녀의 행보에 따라 당신의 말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의 날숨은 이미 가슴의 빗장을 열고 나가 두 입술 장막을 걷고 나가 공중에서 공명한다. 그/녀에게 가 닿을지는 이젠 그/녀의 몫인 것. 그런 것. 제 아무리 꼰대에 의한 것이라도, ‘타인에게 말걸기’는 언제나 이래야만 하는 것. 이럴 수밖에 없는 것. 허벅지가 제법 무거워진 것을 보니 자전거 여행은 조금 길었던 모양이다. 돌아와 자전거를 들여놓는데, 뒤에서 타던 이가 입을 뗀다. “아까 하얀 물새떼 봤어? 우와, 고작 안양천에 그런 게 있어서 신기했어. 날아가는 모습까지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다. 이 녀석도 좋은 풍경 놓치지 않고 볼 줄을 안다. “응, 나도 봤어. 다음엔 자전거 세워놓고 같이 보자.” 이미지출처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detail&rev=4&query=%B0%ED%B1%E6%B5%BF&from=image&ac=-1&sort=0&res_fr=0&res_to=0&merge=0&start=66&a=pho_l&f=tab&r=6&u=http%3A%2F%2Fnemo.naver.com%2Fnemo%2F66573%2F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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