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정상미

두 가지 시계

Mon Mar 03 2008 03:51: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두 가지 시계 영원히 널 사랑해 마주앉은 사람의 시선이 따갑다. 그리고 뜨겁다. 잡은 손이 좋다. 얼굴을 담뿍 붉게 물들이고,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운을 뗀다. “영원히 널 사랑해.” 그리고는 이내 나의 긍정을 요구하는 눈빛. 원하는 대답은 맞잡은 손에 부합하는 ‘나도 그래.’일 것이다. 물론 이 대답은 ‘서슴없는’ 것이어야 한다. 서슴없는‘나도 그래.’ 대신 고개만 가벼이 끄덕이고 있다. 그 대답을 무겁게 여겨 주저하고 만다. ‘서슴없을 수 없는’ 나는 ‘회의하고 있는’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아야 하는 것일까. ‘영원’이라는 요망진 시간대 사람들은 쉽게 ‘영원’을 약속하고, 또한 쉽게 ‘영원’을 폐기한다. 그것이 사랑을 위한 것이든, 이념을 향한 것이든, 투쟁을 겨눈 것이든. 이 세상에 쏟아지는/버려지는 ‘영원’이 너무 많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토할 것만 같다. 그 ‘영원’을 믿지 않으니까. ‘영원히 널 사랑해’라는 말도, ‘영원한 동지애’로 함께 투쟁하자는 말도, 변치 않을 ‘영원한 우정’도, 우리 엄마 친구들의 ‘영원한 오빠’ 조용필도. 아, 마지막 것은 취소. 관념상의 예측으로 보나, 실증적 경험들로 보나, 나의 이 잘난 상식으로 보나, ‘영원’이라는 시간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조차 인류역사 내내, 이른바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고꾸라져 죽어 버렸는걸. 아, 신이 죽었다던 니체도 고꾸라져 죽어버렸고. 싹은 자라나 꽃을 피우고 꽃은 저버려 열매를 남기고 열매는 다시 누군가의 뱃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진다. 지금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아, ?글 창에 커서가 이리로 넘어온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피 끓는 동지애도 피가 다 끓어 쫄아들고 말면 그 뿐, ‘우리는 영원한 동지!’를 외치며 끝나는 민중가요 “동지가”의 가사가 서럽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헤어진다는 것과 동의어다. 무엇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것이 끝난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물론 가운데에 이런 어색한 단어가 하나 들어간다는 것쯤은 인정해두자. ‘언젠가는’ 아까부터 연신 당신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그래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당신의 그 말에 진심으로 가슴을 끄덕여 줄 수가 없다. ‘영원’이라는 시간대가 ‘실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붉어진 얼굴이 언젠가는, 혹은 머지않아 낯빛으로 사위어 들 것이라는 걸, 그런 눈빛으로 나를 더는 바라보지 않게 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나 역시 지금 잡은 손을 언젠가 털썩 놓아버리게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처럼 ‘똑똑하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사실’이 지금껏 증명되어 왔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껏 쏟아져 온/쏟아져 올 인류의 수많은 ‘영원에 대한 맹세’란 모두가 한낱 부질없는, 보푸라기에 불과한 것일까. 앞으로 쏟아질 또 많은 ‘영원’들에 대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심히 미심쩍다는, 짯짯한 시선을 내보내야 ‘실패’하지 않는 것일까. 그럼 나는 똑똑해지는 것일까. 우리가 쏘았던 모든 화살을, 뱉었던 모든 해타를, 담아둔 모든 날숨을 그저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아니 내뱉는 순간,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매순간 이른바 ‘리셋’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해괴망측하고 요망지기 그지없는 ‘영원’이라는 시간대 앞에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영원’이라는 시간대는 다른 시간대와는 약간 상이한, 매우 독특한 시간대이다. 단순히 1년, 2년, 3년의 무한등차수열의 끝에 존재하는 어떤 값이 아니다. 영원이라는 시간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선은 실증적이고 상식적인 시선이 아니다. 1년, 2년, 여름방학, 또는 대학시절과 같은 시간대는 행위의 종결과 함께, 혹은 기점에서 종점에 도착하는 순간에 종료되고 마는 시간대이다. 그러한 시간대에서는 시간 안에 행위가 있다. 예컨대 지난 3년간 나는 대학에 다녔고, 연극을 했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시간대는 행위 안에 시간이 있다.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영원이라는 시간은 열린다. 사랑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 영원이라는 시간은 열린다. 동지의 팔을 걸고 있는 그 순간에 영원이라는 시간은 열린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셀 수 없는 이유는 시간의 길이 때문이 아니라, 기점과 종점이 없기 때문이다. 행위는 종결되지만 영원은 종결되지 않는다. 그 행위 안에서 영원은 영원히 열려있다. 따라서 이미 있었던 행위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는 한 영원이라는 시간대는 그 행위 속에 영원히 존재한다. 물론 행위가 종결된 이후에도. 지금 내게 영원을 약속하는 마주앉은 사람과 설령 헤어지게 된다 해도, 우리가 쏘았던 화살을, 뱉었던 해타를, 담아둔 날숨을 깨끗하게 ‘무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영원은 영원히 열려 있게 된다. 영원이라는 시간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쩌면 ‘시선’이 아니라 ‘체온’인지도 모르겠다. 두 가지 시계 따라서 ‘우리는 3년간 사랑을 했다.’라는 말과 ‘우리는 영원히 사랑을 했다.’라는 두 문장은 모순되지 않는다. 3년을 ‘계산하는 시계’와 영원을 ‘선언하는 시계’는 상이한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놀랍게도 우리는 두 가지 시계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무거운 맹세를 뱉어냈던 온 인류를, 그리고 누구보다도 내 앞에 앉은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주앉은 사람의 말에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일말의 의심도 회의도 없이. 앞도 뒤도 보지 않는 정신없음으로. 따라서 나는 이와 같은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와 같이 3월 기사 마감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두 시계를 모두 책상 앞에 불러 본다. 짯짯이 두 시계를 뜯어본다. 이내 시계 하나를 책상 서랍 속에 깊히 넣어둔다. 딸깍- 하고 서랍을 잠궈 버린다. 지금 이 순간은, 혹은 좀 더 오랜 시간동안은, ‘계산하는’ 시계를 서랍 속에 덮어두고 ‘선언하는’ 시계를 가슴에 품고 다니기 위해. 그리고는, 서슴없이 마주앉은 사람의 말에 가슴을 끄덕인다. ps. 본인의 상태가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로 기사도 궤변만 널어놓은 엉망구리, 게다기 마감도 못 지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편집장님 싸랑해여, 영원히! 쪽-♥<-미친게야ㅉㅉㅉ 이 모든 게, ‘선언하는’ 시계 때문이니, 부디 자비를- 이미지 출처: http://imagebingo.naver.com/album/image_view.htm?uid=ekqlehvm1121&bno=28795&nid=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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