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이야기

민주

우보연

민주 그래 맞다. 민주였다.그녀의 이름은 민주였다. 민주. 민.주. 사회책에서 TV, 신문 어디에서나 흔하게 찾을 수 있는, 그 이름. 민주.민주. 민.주. 근데 그것뿐이다. 더 이상 그 이름을 설명할 다른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그 민주와 다른, 특별한 민주가 되기 위한,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도, 그녀의 목소리도, 그녀의 향취도 어느 것 하나 K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K의 머릿속으로 무엇인가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가 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림자가 존재하기에 그것은 분명 형체를 가지고 있을 테지만, 도저히 그 형체는 이름과 성별 이상은 가지지 못한다.도대체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를 언제 만났던 것일까?그녀는 특별한 여자였을까? 그녀가 첫사랑인가?아니면 잠깐 스쳐지나갔던 피상적인 인간관계의 하나였을까?그런데 왜 이름만이 떠오를까?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문득. K는 시선을 아래로 돌린다. 아래에는 3730이라는 숫자가 반짝이고 있다. 3730. 이 숫자는 뭐지? K는 3. 7. 3. 0 숫자 하나 하나를 발음해 본다. 뭔가 알 수 없는 숫자들이 모며 3730이라는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숫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그 때, 뒤에서 무엇인가 불만에 가득 찬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그 소리에 K는 지금 자신이 은행 365일 코너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현금인출기가 K의 현금카드를 뱉어낸다. K는 이윽고 3. 7. 3. 0 이라는 숫자의 조합이 자신의 은행잔고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왜 3730원 밖에 남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바닥난 거지?월급날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없는 거지?카드요금과 각종 세금이 자동 이체 된 걸까? 저번 달에 산 겨울코트를 일시불로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바닥날 리가 없는데. 뭔가 잘 못 된 걸까?그 때, 좀 더 불만에 가득 찬 소리가 들려온다.‘저기요.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하셔야죠.’K는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는 K의 일거수일투족을 뜯어보는 세 사람이 서 있다. 그 사람들의 불만에 찬 시선을 느끼며 K는 문득.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다. 왜 갑자기 K의 얼굴이 붉어졌는지 난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이 바쁜 도시의 일상 속에서 은행잔고를 확인하려는 세 사람을 불만에 차게 만들어서인지, 아니면 민주라는 이름의 여자의 형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바닥난 은행잔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K는 홍조를 띤 얼굴로 은행 365코너를 빠져 나온다. 거리의 바람이 차갑다. K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는다. 차가운 거리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며 K는 생각한다.저들은 민주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들도 그들 각자의 민주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근데 저 사람들의 통장잔고는 얼마나 될까?저 사람들도 겨울코트를 일시불로 산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빡인다. K는 빨간불로 바뀌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A급 턱수염을 가진 A부장에게 또 혼나지 않으려면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회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K는 빈 은행잔고를 채우기 위해 걸음 재촉한다. 그에게 민주라는 이름은 다가 왔지만, 그에게 더 이상 민주는 없다. 글 l 우보연 cinewoo@naver.com

Mon Dec 31 2007 16:52: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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