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r

문경연

인생, 살아간다는 것

Tue Nov 06 2007 20:36: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인생, 살아간다는 것 루이제 린저는 그의 저서 ‘생의 한가운데’에서 “인생에서 가끔은 좀 덜 이성적이 되고 아주 커다란 어리석은 행위를 범하고 미친 듯한 혼란 속에 빠져들어 갈 수 있다면 얼마쯤의 희생을 감수해도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때로 모든 것을 걸 만한 위험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가”라 반문한다. 이 문구를 읽으며 나는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주인공 부귀가 떠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너무나도 평범해 지루할 수도 있을 만한 소설 ‘살아간다는 것’.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인생, 과연 평범하기만 한 ‘인생’인가!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범한 중국인민의 삶을 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인생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이 소설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소설이다. 1940년대 초, 주인공 부귀는 지주집안의 소지주이다. 그는 노름으로 마침내 집까지 탕진한다. 화를 못이겨 그의 아버지는 죽고, 부인마저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린다. 걸인이 되어 떠도는 부귀. 2년 후, 절망에 빠진 부귀 앞에 아들을 안고 부인이 돌아온다. 노모와 함께 가난하지만 열심히 인생을 개척한다. 부귀는 자기 집을 빼앗아간 용이의 도움으로 그림자극을 시작한다. 1949년, 그림자극을 상연하며 전국을 유랑하던 부귀는 난데없이 전쟁의 한복판에 빨려들어간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온다. 1950년대, 노모는 죽었고 딸은 심한 열병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다. 혁명이 끝난 직후, 아내와 두 자식들은 아침 잠을 견뎌가며 물 장수를 하고, 부귀는 그림자극을 한다. 다시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정을 이룬다. 그러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가해자는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인생의 동반자 춘생이다. 1960년대, 1966년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중국을 덮는다. 딸의 결혼, 나이를 먹은 부귀와 부인은 딸의 결혼에서 행복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의 권위가 송두리째 부정되는 사회 속에서 딸은 의사조차 없는 병원에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는다. 그 이후, 비극이 있어도 삶은 계속된다. 아들과 딸의 무덤을 찾아간 노부부는 못 먹어 늘 고생하던 아들에게는 20개의 만두를, 삶에 겨워 사진 한 장 제대로 남기지 못했던 딸에게는 사진첩을 펴놓고 옛 시절을 회상한다. 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큰 줄기는 대충 이러하다. 주인공 부귀의 인생이 30년 이상의 긴 세월 속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떤 역사의 큰 물줄기로 인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잘 그린 소설이다. 작가 위화는 무엇을 그리려고 했던 것일까. 이는 ‘한 마리의 닭이 자라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 소가 되고, 소가 자라 사회주의가 된다’는 부귀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인생은 늘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살다보면 가난과 증오, 죽음을 만나기도 하지만, 희망은 늘 그렇게 자란다는 것.작가는 1949년의 전쟁도, 1966년의 문화대혁명도 그러한 성장과 희망의내러티브 속에서 관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작가는 역사에서 시행착오조차도 귀중한 체험이라고 보는 게 아닐까. 주인공 부귀야말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는가. 도박으로 전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학교에 가기 싫은 아이를 억지로 데리고 갔다가 아들을 죽게 만들었고, 딸을 살려줄 왕 교수에게 만두를 먹이고 물을 먹여 결과적으로는 딸을 죽게 만들었다. 부귀는 아마 자신을 죽도록 증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귀는 끝까지 살아남아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착오와 광란의 역사를 경험한 중국 인민들에게 부귀의 시행착오를 통해 넌지시 말해주는 듯 하다. 살다보면 그런 때도 있는 법이라고. 사회주의 혁명도 문화대혁명도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한 선택이었다고.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작가의 날카로운 비판도 들어 있다. 위화는 모택동의 지도 아래 전개된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을 의식적일 정도로 비평마저 생략한 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상징적으로 그림자극을 통해 봉건 사회와의 단절을 표현했지만, 사상의 변화에 별다른 저항 없이 수동적인 (부귀를 위시한) 중국 민중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담담함 속에서 작가는 용이와 춘생의 삶을 통해 급격한 신분 변동 등 모순이 가득 찬 시대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중국 민중의 전형적인 삶을, 부귀의 아이 봉하와 유경의 죽음을 통해 사회적 모순 때문에 희생되는 민중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보이지 않게, 순응하고 살아가며(活着) 기다리기만 하는 중국 민중들의 무비판적 수용 태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중국 민중들의 ‘인생’을 그린 소설이. ▶ 만두, 인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한. 이 소설에서는 만두가 등장한다. 항상 잠이 부족했던 아들에게 부인은 만두 20개를 점심으로 싸 준다. 하지만 아들은 그 만두를 하나도 먹지 못한 채, 비명횡사하고 만다. 또 그 만두는 딸의 죽음에서 다시 등장한다. 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 부귀는 딸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을 만한, -며칠을 굶은- 왕교수에게 만두를 먹이고 물을 먹임으로써 결국에는 딸을 죽이고 만다. 만두를 먹고 왕교수가 체해, 결국 딸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자의 이름이 만두인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부인은 아들의 묘소에 만두를 들고 간다. 그리고 부귀는 하나뿐인 핏줄 손자 만두에게, (아들에게 했던 말 그대로), ‘닭이 자라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은 자라서 소가 된다’는 생물의 진화론을 들려준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생활은 좋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만두는 이에 대해 ‘소는 뭐가 되지요?’라고 묻는다. 부귀는 ‘만두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소를 탈 필요 없이 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탈 수 있을거야,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나아질 거야’라고 대답한다. 격변의 세월을 거친, 다소 수동적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거’라는 소박한 소원을 후세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만두처럼 속이 꽉 들어찬 것, 그리고 빵빵한 것이라는 게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바가 아닐까. ▶마지막, ‘이름’ 속에 담긴 인생 어떤 사람의 인생 최대목표는 ‘부귀영화’를 쫓는 것일 수도 있고, ‘가문의 영광’일 수도 있다. 소설 ‘살아간다는 것’에서 등장인물의 이름은 그런 인생의 목표들을 지칭해 준다. 주인공 ‘부귀’의 이름을 보자. 말 그대로 ‘부귀’는 부귀영화를 지녔었다. 하지만 그의 ‘부귀영화’는 도박, 파산과 함께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그의 아들 ‘유경’. ‘경사가 있다’는 그의 이름과 같이 그의 출생은 집안의 경사, 가문의 영광이었을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그의 죽음은 부모의 가슴에 상처가 되고 만다. 풍하(風霞). 바람과 노을이라는 딸의 이름은 그들의 인생고난과 저물어 가는 그들의 인생 결말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름처럼 풍하는 바람처럼 살다가 노을처럼 저물어 갔다. 그러나 그 중에 부인 가진(家珍)의 이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집안의 보배’라는 이름처럼 그는 남편이 없는 가정에서도 열심히 가정을 꾸려나가고 -비록 한 번은 남편 곁을 떠나긴 했지만- 그가 없었다면 서부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집안의 보배다. 아마도 작가는 이름에서도 인생의 갖가지 모습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루쉰과 함께 20세기의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왕멍은 저서 ‘나는 학생이다’에서 초월과 비약으로 도달하는 인생의 경지인 ‘명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우환과 고통을 이겨낸 후의 명랑함이며, 역경과 위험에 봉착했을 때의 차분함이며, 모든 인생의 고난을 능히 반추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명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부귀와 부인 가진, 사위와 손자 만두는 ‘명랑’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다. 온갖 풍랑을 겪은 노부부는 편안해 보인다. 설사 그들이 광란의 역사 앞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건 역사의 파도 앞에서 개개인이 무력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중국 민중들에게 과거의 지나치게 순응적이었던 태도를 비판하고 밝아오는 미래에 좀 더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당부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민초 4기 서울대 인류학과l 문경연 mky21@naver.com

(06143)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322, 9층  TEL. 02-508-2168 FAX. 02-3452-2439 

COPYRIGHT 2019 ALTWELL MINCHO SCHOLARSHIP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