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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엇갈림

우보연

가을의 엇갈림 가을이다.찬바람이 아침저녁으로 귓가를 스치고, 도시는 가을빛깔로 물들어있다. 낙엽 떨어진 길을 걷다가 문득 뭔가 그리워진다. 뭔가 부족하다. 고기를 먹고 이를 쑤시지 않은 찜찜함이 느껴진다. 따뜻한 외투를 꺼내 입었고, 제철과일도 먹었는데,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밥 열 그릇을 먹고도 부족한 이 허기짐은 도대체 멀까? 뭐지? 뭘까? 라면에 젓가락질을 하다가도 멍하니 있다가 팅팅 불은 라면을 먹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서 몇 킬로를 걸어가기도 하고,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동네를 미친듯이 달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다가 초점 흐린 눈으로 멍하니 있으니까 친구가 ‘너 가을 타니?’ 라고 한다. 그래 가을이구나. 지금이 가을이었지. 친구의 말 한마디에 난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집으로 가는 길에 비디오가게에 들렸다. 극장에서 못 본 최신작 영화들이 날 선택하라고 손짓했지만, 눈도 돌리지 않고 예전에 봤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 ‘번지점프를 하다’, ‘파이란’ 세 개의 영화를 골랐다. ‘러브레터’와 ‘화양연화’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나 같은 놈이 또 있구나’ 라고 속으로 만족해하며 계산을 하려니까 알바생 여자가 날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래 나 가을 탄다. 왜?, 가을이니까 이 계절을 좀 느껴보련다 왜?’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세편의 영화를 주구장창 배고픔도 잊은 채 새벽녘까지 봤다. 물론 영화를 다보고 라면을 한 솥 끊여 먹긴 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니 제대로 가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젠 팅팅 불은 라면을 먹지 않아도,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지 않아도, 초점 흐린 눈으로 멍하니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다. 가을에는 멜로영화를 봐야한다.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의 따스한 온기를, 싸늘하게 귓가를 맴도는 바람의 향기를 느끼려면 멜로영화를 봐야하는 것이다. 가을에 유독 멜로영화가 쏟아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엇갈림 멜로영화에는 엇갈림이 있다. 시간, 공간, 방향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엇갈림이 있어야 진정한 멜로영화가 되는 것 같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나를 사랑해왔지만 나는 그녀가 떠난 후에야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시간의 엇갈림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미국에 있다.’ 혹은 ‘죽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공간의 엇갈림이다. 멜로영화의 주인공들은 만날 듯 만날 듯 하면서 만나지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 그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방향이 엇갈리는 사랑도 시간과 공간이 엇갈리는 사랑만큼이나 서글프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그녀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즉, 시선의 방향이 다를 때, 우리의 안타까움은 배가 된다. 이 ‘방향의 엇갈림’을 다른 말로 하자면 삼각관계일 것이다. 춘향전의 성춘향과 이몽룡, 변사또의 관계가 그러할 것이다. 약간 비유가 부적절한 듯 하지만 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와 심은하는 시간과 공간의 엇갈림 속에 있다. 한석규는 그녀와의 사랑을 끝마쳐야하고, 심은하는 시작하려한다. 그리고 한석규는 죽는다. 둘의 사랑은 심은하가 한석규가 마지막에 다다른 공간으로 가야만 결합 될 것이다. 그리고 ‘파이란’은 최민식과 장백지의 공간의 엇갈림 속에서 우리를 울리고 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이 세 가지 엇갈림이 모두 나오며 이병헌을 울린다. 그리고 우리도 운다.이런 엇갈림을 보면서 ‘거 웬만하면 좀 만나게 해주지.’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근데 그러면 안 된다. 그건 로맨틱 코미디가 된다. 멜로영화가 아니다. 그러니 굳이 가을에 안 봐도 된다.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영화관에 앉아 팝콘과 콜라를 양손에 잡고서 누런 이를 드러내며 보아도 되는 것이다. 난 멜로영화를 좋아한다. 아니 그 안타까움을 좋아한다. 멜로영화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엇갈림을 통해 안타까움을 느끼며 가슴 아파하지만, 그러면서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인생도 조금은 전진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처럼 가을날, 팅팅 불은 라면을 먹거나,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거나, 강의실에서 초점 흐린 눈으로 멍하니 있는 사람들은 지금 바로 비디오가게로 달려가라. 그리고 가을에 그 빛을 발하는 영화를 보라. 그러면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다 채워주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까... 글 l 우보연 cinewoo@hanmail.net

Sun Oct 31 2004 15:52: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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