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정상미

새로운 노래가 필요해!!

Sun Jul 08 2007 04:55: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새로운 노래가 필요해 ※ 주: 이 글은 특정 가수를 비방할 목적으로 써진 것이 아니며,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편견의 소산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혹여 불쾌하실 것 같으면 지금 당장 다른 페이지로 이동 plz- #0. 스물 둘, 갈증 내지는 가증 이제야 나 태어난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요 그대를 만나 죽도록 사랑하는 게 누군가 주신 내 삶의 이유라면 더 이상 나에겐 그 무엇도 바랄 게 없어요 지금처럼만 서로를 사랑하는 게 누군가 주신 나의 행복이죠 ( ‘감사’, 작사 ? 작곡 김동률, 김동률 베스트 앨범 “Thanks” 中 ) 그의 새 노래가 가는 카페마다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노래 좋다며 기분 좋게 흥얼거린다. 나는 목이 마르다. 눈앞의 아메리카노를 신경질적으로 들이키고, 남은 얼음을 힘주어 깨물어 먹는다. 그래도 목이 마르다. 고만 귀를 막아 버린다. 평온한 얼굴로 영원한 사랑이나 노래하는 그 따위……. 목이 마르다. 목이. #1. 열여섯, 득음 함께 배를 띄웠던 친구들은 사라져가고 고향을 떠나온 세월도 메아리 없는 바다 뒤편에 묻어둔 채 불타는 태양과 거센 바람이 버거워도 그저 묵묵히 나의 길을 그 언젠가는 닿을 수 있던 믿음으로 난 날 부르는 그 어느 곳에도 닻을 내릴 순 없었지 부질없는 꿈 헛된 미련 주인을 잃고 파도에 실려 떠나갔지 난 또 어제처럼 넘실거리는 순풍에 돛을 올리고 언제나 같을 자리에서 날 지켜주던 저 하늘에 별 벗 삼아서 난 또 홀로 외로이 키를 잡고 바다의 노랠 부르며 끝없이 멀어지는 수평선 그 엔젠가는 닿을 수 있단 믿음으로 ( ‘고독한 항해’, 김동률 작사 ? 작곡, 김동률 1집 “The Shadow Of Forgetfulness” 中 ) 그 무렵 나는 열여섯이었다. 초딩 때부터 다른 친구들이 보이밴드에 열광할 때, 혼자 조숙한 척 고상한 척, 발라드를 즐겨 듣고 신승훈을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신승훈의 사랑노래가 슬슬 지겨워졌고, 새로운 목소리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바로 저 사람이다. 률. 일곱 살 때부터 계속되어 온 '영혼의 연인'을 신승훈에서 김동률로 갈아치운 것에 대해 친구들은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비웃기도 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김동률도 사랑 노래를 더러(사실은 꽤 많이?) 부르긴 하지만, 그에게는 그 혼자만의 방황과 독백이 있었다. 순수하게 ‘음’만을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의 귀를 갖지는 못했기에 조야한 언어로 말해보자면 그의 사운드에는 볕이 따사로운 아름다운 봄날은 없었다. 약간은 쓸쓸하게 비 내린 가을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늘 혼자였다. 새벽인지 초저녁인지 알 수 없는 어스름과 함께. 그래, 그에게는 (유치한 표현이지만) 청춘의 우울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사춘기에서 (어디까지나 머릿속 계산으로) 조기 졸업시키고 그 시절의 그와 나를 동일시했다. 그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귀에 감고 함께 번민했다. 김동률에게 가던 관심은 그와 함께 활동을 했던 다른 가수들에게도 뻗어나갔다. 프로젝트 앨범 “카니발”을 듣고는 함께했던 이적의 (패닉)앨범을 찾아 들었다. 김동률이 내면의 독백을 읊조렸다면 이적은 좀 더 대 놓고 세상에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 내가 가장 열광했던 건 초기 앨범-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변혁적인! 앨범 “밑”-들이었다. 이미 전개된 이적의 음악세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나는 내가 당시에 들었던 패닉의 앨범이 그의 음악세계의 전부라고 착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동률이 안으로 파고드는 늪 같았다면 이적은 흔들리는, 그러나 형형한 불꽃같았다. 어디까지나 내가 보기에는. '이게 무슨 냄새야?' 뭔가 썩고 있는데 그게 뭔질 모르겠어 너인지 나의 폐인지 혹은 그들의 충혈된 심장인지.. 뭔가 썩고 있는데 부글대며 곪고 있는데 그게 뭔질 모르겠어 갓 삐져나온 아기의 꼬리 속부터 헐떡이는 노파의 부푼 배안까지 배어들고 죄어드는 이 메슥거림 뭔가 썩고 있는데 그게 뭔질 모르겠어. 세상 밑에 춤추는 이 냄새가 우릴 병들게 해 ( ‘냄새’, 이적 작사 ? 작곡, 패닉 2집 “밑” 中 ) 이들의 음악은 이유 없는 갈증으로 갈라진 내 목을 조금씩 축여 주었다. 난 계속 내 목을 축여줄 노래하는 이들을 찾아 다녔다. 뒤늦게 자우림을 만나 밤이 새도록 그들의 노래를 불렀고, 이상은을 만나 무릉도원에 들락거렸다. 그들은 ‘너 아니면 죽고 못 산다’, ‘영원히 너만을 사랑해’라는 식의 뻔한 노래로 질질 짜지 않았고, 노래방 사운드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운드 속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때도 신선하다고 듣고 충격 받던 그네들의 노래 대부분이 옛날 옛적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나는 신나게 그들의 행적을 역추적 중이었으니까.) 나는 그들이 보여주는, 들려주는 세계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그러면 ‘이 세계’가 조금은 가려졌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 세계에서는 ‘레몬과자 맛이 나는 아름다운 아이’와 손을 잡고서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을 만나러 다녔고, ‘백수광부 아내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떠나가는 님에게 재회를 ‘염원’하는 뱃노래를 불러줬다. #2. 정확히 언제부터였을지도 모르는, 변화 그리고 변심 호사스럽게도 CD플레이어를 갖게 되면서 테이프 수집을 중단한 내가 처음으로 산 김동률의 CD는 4집 ‘토로’였다. 그런데 어딘가 예전 같은 어스름이 없었다. 나의 두근거림도 멈춰 버렸다. 수많은 트랙 중에서 마음에 남는 곡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수없이 반복해 들었지만 그의 4집 앨범 앞에서 난 여전히 ‘이방인’이다. 이제까지도 어느 것 하나, 제목이 제대로 기억나는 곡이 없다. 그 앨범을 낸 뒤 그는 꽤나 오랜 시간을 침묵했다. 콘서트 라이브앨범이 나오긴 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가 다시 나를 그의 새로운 늪 속으로 데려가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여느 ‘중견’가수들이 하듯이 ‘판매고가 보장된’ 베스트 앨범을 냈고 그 베스트 앨범에서 선보인 신곡이 바로 내 귀를 급기야 틀어막아버린 ‘감사’이다. 나는 전혀 감사하지 않다. 그의 늪은 이제 영원히 봉인되어 버린 걸까?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 줘서. ( ‘다행이다’, 이적 작사 ? 작곡, 이적 3집 “나무로 만든 노래” 中 ) 영원한 ‘왼손잡이 피터팬’으로 남아줄 것 같던 이적도 슬슬 ‘어른’이 되어 갔다. “이젠 남 욕할 때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볼 때”라는 너무도 어른 냄새 풀풀 나는 말을 하며 들고 온 그의 새 앨범. 거기에는 이전의 강렬한 메시지도, 끝없이 이탈을 꿈꾸는 사운드도 사라지고 없었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 군더더기 없이 소박한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라고 그는 앨범의 의도를 밝혔지만 어딘지 모르게 난,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가 나를 남겨두고 혼자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타이틀 곡 ‘다행이다’의 분위기는 흡사 김동률의 ‘감사’와 한 짝처럼 느껴질 정도이다.(실제로 김동률이 이 곡을 타이틀곡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오후의 빛을 노래하는 이 노래, ‘다행이다’. 나에게는 전혀 다행스럽지가 않다. 다른 이들도 나를 떠나가긴 마찬가지였다. 이상은도 신비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덮어버리고 ‘예쁜’노래들을 부른 지 오래이다. 김윤아는 어디로 가려는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변했다. 남들처럼 ‘꿈같은 사랑’을 노래하고 그토록 부정하던 ‘지금 여기’를 아름답게 포장하기 시작했다(고 나는 느꼈다!). 혹은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세상에 가 맺히지 않고 세상을 빗겨 지나갔다. 즉, 지나친 감상주의로 나아가 홀로 감정의 잉여를 이기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고 나는 느꼈다). 그들은 왜 변해 버린 걸까. 왜 나를 이 늪에 혼자 남겨두고 가버린 걸까? 나는 그네들을 따라서 이 늪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다짐했던 건 질끈 동여맸던 건 그게 무엇이었건 뜨거웠었고 태양을 겨냥했었던 숲을 꿰뚫었었건 다만 타오르던 가슴에서 터져 나오던 이제는 모두 어디에 그 기억이라도 그 흔적이라도 어디에 그 마음이라도 그 다짐이라도 (‘우리가 쏜 화살은 어디로 갔을까’, 이적 작사, 김동률 작곡, 김동률 3집 ‘歸鄕’ 中 ) #3. 무죄판결, 일단은 귀를 막고 예술은 결국 인간의 창조물이고, 여기에는 인간 자신이 투사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곡을 직접 작사하고 작곡했던 이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노래에는 그들의 삶이 더욱 강하게 투사되어 있다. 아니, 그들의 노래는 곧 그들의 삶이었다. 그들의 노래가 방황과 우울을 이야기하고, 세계를 향해 날선 시선을 내보였던 건, 당시 그들 삶 자체가 그랬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변화하는 건, 그들의 삶이 또 그렇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변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일관되게 자신의 삶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그들은 나이를 먹었고 남들이 알아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들도 이젠 찬란한 태양 아래를 걷게 됐다. 더 이상 음지에서 태양을 겨눌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잔뜩 긴장해서 세상을 향해 세우고 있던 칼날도 ‘살아간다는 것’ 그 구질구질한 굴레 속에서 한껏 무뎌지고 둥글어졌을 것이다. 이젠 그들도 어딘가에 ‘정착’할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됐다. 그들은 인간 삶의 ‘정착의 대명사’ 결혼을 이야기 한다. ‘평생 빼지 않을’ 반지를 가지게 되었다. 스탠딩 마이크를 잡은 그녀의 손에서 으스대던 그 결혼반지가 얼마나 비대하고 거창해 보였는지 모른다. 그들은 이제 과거에 자신들이 이야기하던 우울이나 방황, 날선 비판 같은 건 어린 날의 치기어린 투덜거림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온화한 미소로 이 ‘아름다운’ 세계를 ‘긍정’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지나야 소년은 비로소 알게 될는지 나무보다 높이 닿기엔 인생은 너무도 짧다는 것을 소년이 이렇게 소년이라 불리는 것조차 너무나 짧은 순간인 것을 냇물에 비친 소년의 얼굴에서 소년을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 ‘소년’, 이적 작사 ? 작곡, 이적 3집 “나무로 만든 노래” 中 ) #4. 다시 스물 둘, 새 노래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해도 나는 여전히 미간을 찡그리지 않고는 그들의 음악을 들어줄 수가 없다. 나는 결혼반지가 없을 뿐더러 원하지도 않으며,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고독한 항해’를 하고 있으며, 내 눈에 이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한 마디로, 나는 아직도 비루한 청춘의 그림자 속에 있다. 결국 문제는, 피터팬은, 나인지도 모른다. 싫으면 안 들으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귀는 이미 꽃다운 님들의 향기로운 목소리에 멀어버렸다. 이대로 영영 헤어지기에는 가슴 한 구석을 너무 많이 내어줬다. 여전히 그들을 애틋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미간을 찌푸리지 않고서는 들을 수도 없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그들이 다시 한 번 음습하고 곰팡내 나는 늪을 헤매며 근처의 늪을 헤매고 있는 나에게 걸 맞는 노래를 들려줬으면 한다. 그래, 나는 그들이 다시 수렁에 빠지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안온한 행복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내게 걸 맞는 늪 같은 노래를 위해서. 그들의 새 노래는 더 이상 새 노래로 들리지 않으니까. 내게는 그들의 행복을, 일상을 긍정해 줄 아량이 없다. 그들의 소중한 것을, 나는 공유하지 못한다. 머언 먼 언젠가, 나도 파괴와 방황과 우울 그리고 칼날을 노래하는 누군가에게 피식, 하고 웃음을 날리는 소위 ‘어른’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웃음은 분명 노래하는 그들에 대한 비웃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익숙했던 것을 보고 잠시 지금의 나를 향해 던지는 것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때에는, 비록 나와는 다른 궤적에 있는 것일지라도 타인이 새로 갖게 된 소중한 것들을 함께 품어줄 수 있는 그릇을 갖게 됐으면 좋겠다. 아, 이게 바로 ‘잘난 어른’의 모습인가? 우리 둘은 사랑했었고 오래전에 헤어져 널 이미 다른 세상에 묻기로 했으니 그래 끝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쓸려 그저 뒤돌아 본 채로 떠 밀려왔지만 나의 기쁨이라면 그래도 위안이라면 그 시절은 아름다운 채로 늘 그대로라는 것 ( ‘귀향’, 김동률 작사 ? 작곡, 김동률 3집 “歸鄕” 中) 지금, 내게는 새 노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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