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정상미

아는 것은 힘이다

Sun Apr 29 2007 13:38: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아는 것은 힘이다 0. 글을 쓴다는 것이 두려워지는 요즘이다. 내가 무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렇게나 내뱉는 조야한 파편들을 어떻게 당신에게 들어달라고 할 수 있을까. 도무지 사람들이 말이 너무 많다. 다들 그럴듯한 주장을 펴느라 정신이 없다. 자기‘철학’이 넘쳐난다. 싸이월드 대문 글만 봐도 ‘철학자’가 쏟아진다. 아주 간혹 머리를 치기도, 더러는 가슴을 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있지 않아도 좋다. 나도 너도. 나/너는 무얼 바라 이다지도. 그래서 이렇게 두 달에 한 번, 더구나 ‘기자’로서 글을 쓴다는 것이 참, 어렵고 두렵다. 세상에 또 하나 불필요한 썩은 우유를 배출하면서 타인들에게 보여질 권리와 원고료까지 받아 챙긴다. 그런데 난 주제에, 오늘 당신한테 설교를 할 것 같으니. 당신은 그냥 내 글 앞에 눈을 감아도 좋겠다. 무시하라. 1. 하얀거탑을 엄마와 함께 보고 있었다. 의사 준혁은 천재 외과의사로 야망이 큰 사람이었고, 장인과 장인을 통해 알게 된 의사세계의 세도가(?)들과 만나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온갖 비열한 수도 서슴없이 쓰는 인물로 ‘변모’하게 된다. 이에 반해 준혁의 친구 도영은 출세와 명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항상 원리원칙대로 행동해서 윗사람의 심기를 거스른다. 환자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헌신적인 의사로 나온다. 당시 극은 과장이 된 준혁이 자신의 과오로 죽은 환자 때문에 소송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엄마는 준혁에게는 “어휴 저 나쁜 놈!”을 연발하고, 도영에게는 흐붓한 미소까지 흘리면서 열심히 시청중이셨다. 어차피 픽션이고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그렇게 진지하게 분개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짐짓 궁금해져서, “엄마, 엄마가 보기에도 장준혁처럼 저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럼 엄마는 내가 장준혁처럼 살았으면 좋겠어? 아님 최도영처럼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물었다. “얘는 몰라서 물어! 그래도 상미는 장준혁처럼 잘~ 해서 출세해야지! 아, 잘 살아야지!” 뭐 당연히 예상됐던 바라 딱히 놀라울 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아마 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물며 실천적 이론을 설파하며 전 세계 사회주의를 이끌었던 ‘그 마르크스’도 딸이 결혼하겠다고 데려오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너, 돈은 얼마나 벌어? 너 노동운동하는 놈은 아니냐? 운동하는 놈은 절대로 안 돼!” 2. 마르크스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이제’ 없다. 처음엔 자신의 이론적 입장과 상충되는 그의 일화를 듣고 ‘쓰레기!’라는 말이 계속 쏟아졌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평생을 엥겔스와 친척들의 원조를 받으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자신의 딸만은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을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역시 ‘외부’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앎과 삶의 모순과 충돌”은 비단 마르크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누가 오늘날 이 같은 말을 자신 있게 내뱉을 수 있을까. 나 역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믿었다. 알면 실천이 달라질 것이고, 세상은 바뀔 것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대중교육에 뛰어들었다. 오늘의 나는 그들의 그 ‘순진함’에 눈물이 날 것 같다. 계몽이란 물론 빛이다. 안다는 것은 세상을 비춘다. 시커멓게 굴속에 은폐되어 있던, 모르던 것/몰라야 했던 것들을 알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연 나는/ 당신은/ 인간은 아는 대로 행동하는가? 계몽이란 물론 빛이다. 그러나 빛일 뿐이다. 모순은 외부에 드러난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는 것은 힘인가? 아는 것은 도리어 사지의 힘을 쭉 빼앗아 버리고 어떠한 행동도 쉽게 할 수 없게 한다. 아는 것은 고통이요, 고뇌다. 계몽주의자들은 틀렸다. 그 똑똑했던 그들도 모순이 해결되고 세상이 바뀌어가는 데 필요한 그 피 튀기는 지난한 과정, 갈림길에서의 사람들의 고뇌, 인간들의 앎에 대한 배반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알지 못했다. 나는/당신은/인간은 왜 자신의 앎을 배반하는가? 왜 우리가 안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 그 모순 속에서도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친구가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가는 것을 앎에 대한 배반이라고 쉽게 비난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모순된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학벌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명문대에 입학시키려 애쓰는 것은 어떠한가? 사회의 모든 것과 격리되어 알몸으로 땅바닥을 구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모순 속에서 모순을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그 모순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여기서 앎에 배치된 삶을 사는 나를/우리를/그들을 합리화하고 무죄를 선고할 마음은 바이 없다. 배반은 배반이다. 모순 속에서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투쟁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한낱 내가 이렇게 쉽게 일컬을 수도 없이 말이다. 또한 앎과 배치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누가 판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만이 안다. 그로 인한 괴로움도 자신만이 알 것이다. 누가 물어 알 수도, 대신 겪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괴로움, 이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시나 ‘모르는 게 약’이 아닌가? 안다는 것이 고통이라면 애초에 그런 고통이 없도록 모르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내부에서 조금이나마 이탈하여 내부를 조망하는 일 따위 하지 않고 철저히 내부에서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몰랐어.’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모르는 것도 죄가 된다. “빵이 없어? 그럼 과자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이야기하는 앙투와네트에게 당신은 어떻게 돌을 던지지 않을 수 있는가? 계몽주의자들은 옳았다. 앎은 당장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앎은 고정된, 그리고 자명한 세계를 흔들어 놓는다. 무언가를 알고 고통을 느낄 때, 인간은 당연했던 한 갈래 길에서 갈림길로 들어선다. 갈림길에서 인간은 실천의 ‘가능성’을, 세계는 변화의 ‘가능성’을 ‘잉태’한다. 그것의 발현은 물론 이미 말한 것처럼 어렵지만 말이다. 아는 것은 힘이다. 그것은 낮은 목소리로 새로운 세계를 이야기하게 하는 변혁의 힘이 될 수 있다. 세계는 더 이상 ‘그대로 있어도 되는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아끼는 후배 녀석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다. ‘너는 나처럼 괴로워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책을 건낸다. 앎 속에 괴롭더라도 설령 길을 잃게 되더라도 괴로워하며 가 볼 생각이다. 이미 두 갈래 길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에 좋아하는 녀석 하나 둘 길동무 삼을 요량에, 그깟 책값,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다. 내 뱉은 말에 자신이 없어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지만 지금-여기, 이미 어쩔 수 없다. 세계는 이미 이전의 그것이 아니다. 3. 어떤 글이든 쓸 때는 신나게 쓰다가 글이 손에서 완결되는 순간, 글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완제품 우유가 상품이 됨과 동시에 썩어가는 것처럼. 그래서 한 번 쓴 자신의 글과는 다시금 마주하고 싶지 않다. 구역질이 난다. 썩은 우유에 지나지 않는다. 악취가 풀풀 난다. 이것도 이미 썩고 있다. 요점은... 계속 기사 올리는 거 부끄러워서 못할 짓이라는 거다. 조만간 그만두어야 할지. 내동 부끄럽다. 혹여나 여기까지 본 당신, 썩은 우유를 퍼붓긴 했지만 내가 그대 눈까지 씻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죄는 않겠다. 민초 6기 서울대 l 정상미 aporia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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