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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바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Sat Dec 30 2006 18:53: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울리히 벡, 새물결) 사랑! 오- 사랑! -사랑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과 재해석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너는 내 운명’ 그리고 그 다음사랑은 언제나 삶의 사적인 측면에서 출발하고 작고 사소한 일로 찾아오지만, 그래도 세속성을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보거나 밖에서 보면 사랑은 늘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들에, 즉 남편이 되거나 아내가 되는 습관들에, 그리고 아울러 나와 너의 초상과 이것이 은폐하고 있는 일반적 태도에 묶여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인격화되어 있는 물려받은 역할에 묶여 있으며, 그/그녀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서 새롭게 재등장하고 있는 역사와 정치의 힘에 묶여 있다(287p) 유명한 뮤지컬 <헤드윅>의 OST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The origin of love'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처럼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사랑’과 함께 태어났다. 인류역사는 실로 사랑의 역사이고, 사랑으로 형성된 역사이다. 하지만 지금 인류가 역사 속에서 많은 변화를 거듭한 것과 같이 사랑도 그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를 획득하며 변화해왔다. 지금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꿈같이 달콤한 사랑’은 근대의 로맨틱 혁명의 결과이며 그 이전의 사랑은 현재 우리가 꿈꾸는 사랑의 상(像)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종종 사극을 보면서 주인공의 낭만적 사랑을 목격하곤 하는데, 그것은 철저히 현대적 시각의 반영이며 당대에는 그런 감정들은 존재했을지 모르나 감정과 결혼 그리고 성(性)이 현재와 같이 결합된 형태는 아니었다.현재 우리가 꿈꾸고 현실화 시키려는 사랑과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사랑은 달랐다. 그것은 당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작품 속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근대 이전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최근 한국 영화 ‘너는 내 운명’을 비교해보자. 로미오와 줄리엣을 살펴보면, 근대 이전의 사랑과 결혼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사랑과 결혼은 가문의 계급, 경제력 등에 대한 고려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경제적으로 책임질 수 있어야 했고, 여성은 남성이 속한 집안의 빚을 갚아줄 지참금을 동반해야 했다. 즉, 사랑과 결혼이 당사자들의 감정과 그에 따른 결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사랑과 결혼은 당사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는 석중(황정민)이 다방 레지인 은하(전도연)을 사랑하게 되고 석중의 순수함에 호감을 느낀 은하역시 석중에게 마음을 연다. 둘은 결혼을 하게 되지만, 우여곡절 끝에 헤어지게 되나 은하를 너무나 사랑한 석중은 끝까지 은하를 찾기위해 돌아다닌다. 그러나 은하는 자신도 모른사이 에이즈에 걸린 상태였고 이로 인해 감옥에 갖히게 된다. 이런 은하의 사정을 알게된 석중의 가족은 모두 석중의 사랑에 반대하지만 석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은하를 끝까지 사랑하고 결국에는 예전의 행복을 되찾는다. ‘너는 내 운명’에서 석중과 은하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순수한 감정에 충실하려고 하며 사랑을 결혼으로 완성시킨다. 두 작품은 ‘사랑’의 의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근대 이전의 사랑과 결혼은 당사자들의 감정 외에 가문과 그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었으나 현대의 사랑과 결혼은 철저히 당사자들의 감정에 기반한다. 시간의 흐름과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 사랑은 얼마든지 다른 의미가 덧붙여 질 수도 있고 그 가면을 바꾸어 쓸 수 있다. 사랑 그 자체의 의미는 다른 개념들과 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전제이다. 사랑은 하나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수많은 변천을 거쳤으며, 앞으로도 무한히 변화해갈 가능성이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갈구 하는 시대, 사랑하기 힘든 시대 개인화는 남성과 여성이 산업 사회가 제시한 삶의 방식, 즉 핵가족이라는 삶의 방식에 따라남녀에게 주어지던 성별 역할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바로 이것이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키고 있다) 노동 시장과 훈련 그리고 이동성 때문에 자기만의 삶을 오롯이 건설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가족과 인간 관계와 친구들에 대한 책무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있다(30p) 우리는 개인이 되라는 압력과 표준화된 전략을 채택하라는 압력을 동시에 받고있다.(86p) 현대인들은 ‘개인의 발견’됨으로써 탄생한 그 이전 인간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존재이다. 현대인들은 봉건적 결속들과 결별하고 자아 또는 개인을 발견함으로써 근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을 점차 내면화 시켜왔다. 개인의 발견은 전통적 결속들과 결별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새로운 질병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선택의 고민"과 개인화됨으로써 느끼는 '외로움'이다. 즉, 기존의 봉건적 결속은 삶의 영역을 확실히 결정짓는 외부의 요소들 - 자신의 신분, 성, 살고 있는 지역 등-에 의해 무엇인가를 선택할만한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선택해야만 하고, 자기 삶을 스스로 써나가는 개인 일대기의 주연배우들이다.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고, 선택의 자유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온다. 현대인들을, 각자 개인의 일대기를 써나가는 주연배우라고 했을 때 자신의 선택은 오롯이 자신에 판단에 의한 것이어야 하지만 오히려 현대인들의 선택은 사회의 외부조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요인들이 많다. 특히 노동시장의 경쟁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대인들은 노동시장의 가치들을 내면화하고, 직장을 갖더라도 직장의 요구를 또 다시 내면화하여 ‘개인의 선택’이 오롯이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를 내면화에 또 다른 측면임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의 요구는 현대인들을 산산히 갈라놓는다. 부르주아지는 봉건적인 유대를 가차없이 산산조각내고, 적나라한 이기심, 무정한 ‘현금 계산’ 이외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유대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공산당선언 26p) 맑스가 묘사한 관계들의 파편화는 현대의 개인들을 더욱 외롭고 힘들게 한다. 더불어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경쟁을 강요하므로 현대인들에게 사회란, 끊임없는 경쟁속에서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장소 이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사회가 냉혹해질수록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구한다. 현대인들은 사랑에 모든 찬사를 아낌없이 달아주고, 가족에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결혼과 가족을 삶의 모델로 채택하는 것은 거부하지만 정서적 헌신은 추구한다. 안정적인 관계는 오늘날의 젋은이들에게도 이상이자 목표이다(48p) 사랑과 가족은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사회의 냉혹한 경쟁을 보상해주는 개인들의 유일한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개인들은 ‘사랑’을 ‘개인의 선택’에 의해 찾아가고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이는 현대인들의 일대기에서 무대와 배우만 달리한 같은 장면의 연속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의 파트너가 나와 성격이 안 맞아서 이번엔 헤어진거야! 다음 번에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면 평생 행복할 수 있을꺼야’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또 다른 사랑을 찾는다.만약, 사랑이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사랑 이외의 모든 일들 특히 자신의 생계 유지와 관련한 직업갖기는 철저히 노동시장의 요구를 내면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선택하는 개인’과 ‘사랑을 제외한 다른 삶 속에서 개인’은 철저히 분리되고 대립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더욱 숭상되어지지만 사랑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가족, 산업 사회 속에 봉건제 한 사람의 운명, 즉 평생 가사 노동을 할 것이냐 아니면 노동 시장에 적응해 돈벌이를 할 것이냐는 원칙적으로 산업사회에서조차도 요람에서부터 결정된다. 이런 봉건적 ‘성별 운명’을 완화, 무효화, 악화 또는 은폐하는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겠다는 것이 우리의 약속인 것이다.(64p) 산업사회는 행복한 가정에 기초한다. 남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노동을 하여 임금을 받고 그 임금으로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생계를 꾸려간다. 여기서 여성은 가정을 지키고 가꾸며 자식의 교육을 담당하고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위해 편하고 따뜻한 가정을 유지한다. 남성은 ‘행복한 나의 집’에서 따뜻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아내와 자식들을 통해 재충전을 하고 다시 내일 고단한 노동을 하러 간다. 즉, 남성과 여성의 성별역할을 구분하고 그에 따라 여성의 집안으로 유폐시키면서 산업사회를 받쳐주는 제도적 기반으로 가정을 형성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운동은 이러한 산업사회 속에 봉건적 요소를 하나씩 양지로 끌어내었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봉건적 틀 속에 머물러 있던 여성들도 여러 가지 교육과 사회적 참여에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확대될수록 남성들의 봉건적 상태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남성들은 여성의 권리가 위협으로 다가올 때는 언제나 자연의 이치에 호소하여 불평등을 고착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목과 논쟁은 남성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남성들이 강조하는 자연의 이치에 따른다면, 남자의 성공은 경제적·직업적 성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오직 안정적 수입만이 집안을 제대로 먹여살리는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라는 남성적 이상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즉, 이러한 역할-안정적이고 높은 수입-을 수행해내지 못하는 남성은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게 되고, 일자리를 갖고 있는 남성들은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를 내면화해야 하며, 이러한 기대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또는 쓰러질 지경에 이르기 까지 열심히 일해야 한다. 결국 ‘자연의 이치’에 호소하는 남성들의 논리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피폐하게 하는 논리이며, 자본주의가 더 힘차게 작동하는 윤활유의 역할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 da capo, 그리고 새로운 사랑 나는 가정이 성소, 즉 재미와 즐거움만이 넘쳐나는 장소라고 보지 않는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장 야만스러운 피조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비폭력적이고 비파괴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중략) 결혼과 가족 생활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에 훌륭한 장소이다.(172p) 사랑은 개인화의 위험에 저항할 수 있는 최상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이는 사랑이 다름을 강조하지만 모든 외로운 개인들에게 함께함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낡아빠진 지위 상징이나 돈이나 법률적 고려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하고 직접적인 느낌에, 이 느낌이 타당하다는 신념에, 그리고 이 느낌이 향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한다. 연인들 자신이 입법자이며, 서로에게서 기쁨을 느끼며 자체의 법을 제정한다. (311p)처음에 말했지만, 사랑은 변해왔고 또 변할 수 있는 개념이다. 사랑은 우리의 종교지만 우리 스스로가 종교의 교회이며 교주다. 우리 자신과 서로의 파트너가 서로의 규율을 정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에 우리만의 술을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찬미를 거두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책에서 쓰고 있듯, 결혼과 가족 생활을 삶의 오물통을 마주하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나와 다른 존재와 삶을 공유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필연적 과제이며 이를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개인화의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타인과 삶을 공유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타인과 더 넓게는 다른 생명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내 삶과 나와 관계 맺는 누군가의 삶을 얼마나 높게 고양시킬 수 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적 사랑은 서로에게 파괴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개인과 공적 장소에서 노동 시장의 가치를 내면화한 개인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나 스스로에 대한 파괴와 타인에 대한 파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스스로를 사랑의 입법자라고 여기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산업사회에 대한 통찰, 우리의 사랑을 규정했던 자본주의에 대한 변화 없이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시도는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나를 비롯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상상력의 빈곤’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상상 - 이는 주어진 길을 따라가는 것과 반대라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상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고,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연금술사들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우리는 어떤 사랑을 만들어 갈 것인가?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l 김바다 rednoma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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