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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관성, 슬픔의 노래 "김윤영 소설집 타잔"

김바다

슬픔의 관성, 슬픔의 노래 "김윤영 소설집 타잔" 1. 슬픔의 관성 나는 슬픔을 잊었다. 아니 늘 슬픔의 상태다. 그래서 슬픔에 역치가 너무 높아진 것 같다. 인터넷 포탈에 방학 숙제를 대신 해주는 과외 선생님들이 문제가 된다고 탑 뉴스로 뜨던 날, 나는 돈 많은 부잣집 아이의 독후감을 쓰고 있었다.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공세에 내 감정은 어찌나 무뎌지던지 그것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독후감을 한 편 써내려갔다. 삶의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나를 파괴했다. 슬픔은 무뎌져 그것이 슬픔인지 아닌지 조차 분간 못할 상황에 치달아 버린 것이다. 나는 김윤영씨가 그리는 우리 시대의 한 군상이다. 파괴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슬픔이 슬픔인지도 알아채지 못한채 - 혹 알더라도 슬픔의 역치가 너무 높아져 무감각한 상태에 이른 - 이 시대의 표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세라’처럼 몸을 바꾸어 저 멀리 다른 세계로 떠나버리고 싶다. 아니면 앙코르와트의 ‘타잔’이 되어 밀림을 휘저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세라’와 ‘타잔’은 파괴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철저히 파괴당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더 이상 탈출구가 없어 몸을 바꾸고, 밀림으로 가버리지 않았는가. 나와 그들은 파괴의 시대에 하나의 군상이며 피해자다. 1년 반쯤 전 어느 날, 간만에 푹자고 일어난 날 아침이었다. 이력서를 2백 몇 통까지 쓴 이후 남자는 잠을 통 잘 수 없었고 아침까지 퀭한 눈으로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남자는 수면제를 조금식 먹기 시작했고 그것만으로는 불안해 다른 안정제도 같이 복용하기도 했다. (산책하는 남자, 185p) ‘세라’는 몸을 바꾸고, 마장동 김씨는 ‘타잔’이 되어 앙코르와트로 떠났지만, 어디론가 떠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계속되는 실직 상태에서 미친 듯이 이력서를 써대지만 불러주는 곳은 없는 ‘무쓸모’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관성적으로 이력서를 쓰고 또 쓰지만 어느 새 이력서를 쓰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삶의 ‘파괴’는 ‘슬픔’마저 망각하게 만든다. 슬픔의 망각상태에서 또 다른 삶의 지평을 찾아가지만 그것은 파괴의 시대 속에 또 다른 피해자의 양상이며, 또 다른 형태의 슬픔을 양산해내는 길이었다. 2. 파괴의 단면정영수. 그게 바로 선배의 이름이다. 키 170에 몸무게 73, 발 사이즈 275, 약간 대머리에 동그란 얼굴······. 그런데 그때 선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기억이 안 났다고 해서, 내가 아주 당황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아주 익숙한 사물이나 이름도 순간적으로 낯설게 보이거나 까먹는 그런 경험. (얼굴 없는 사나이, 76p) 파괴의 시대라 명명한 이 시공간에서는 거시적인 부분의 파괴보다는 우리 일상의 미시적인 관계들의 파괴가 더욱 괴롭다. 산책하는 ‘남자’, 마장동 ‘김씨’, 세라이기 전 ‘여자’, ‘선배’. 소설 주인공들이 그렇듯 우리에겐 이름이라는 것이 없다. 그저 산책하는 ‘남자’이거나 ‘선배’이거나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 없이도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 사람으로 칭해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그 사람이 안 보일 때 ‘그 사람의 이름이 뭐였더라?’라는 물음이 한 번 지나갈 뿐, 슬픔의 관성은 서로의 삶에 차가운 지나침만을 부여한다. 명함첩 속의 직함에 따라 기억하려는 시도가 달라질 뿐, 이름이란게 우리 삶에 중요하기나 한 것인가. 거창하게 신자유주의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관계의 희미함, 누구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 외로움 속에서 처절히 파괴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쿨하게 살자!” 나느 그것이 외로움에 대한 반작용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상대방을 망각해버리니까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 쿨한 척이다. 3. 노래하자, 슬픔을! 슬픔의 역치가 높아지더라도, 파괴의 시대가 영원할 것 같아도 ‘슬픔’, ‘고통’ 따위의 단어들을 우리의 삶과 손에서 놓아버리면 안된다. 우리가 그것마저 놓아버린다면, 그것은 슬픔의 완벽한 망각이며, 생의 감각의 마비다. 파괴의 손길이 우리 일상으로 파고들어오는 슬픔의 극단 속에서 소설가 김윤영이 그 길을 걸었듯, 나는 슬픔을 노래하겠다. 내 삶의 비참한 고통을 소리쳐 부를 때 무뎌져 가는 눈과 귀와 코 그리고 피부를 소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과 문학의 근본은 ‘슬픔’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슬픔을 직시할 수 있을 때, 파괴의 소용돌이를 빠져나갈 길도 보이게 되며, 또 다른 삶의 슬픔을 슬픔으로서 느낄 수 있다. 희미해진 관계 속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고, 앙코르와트 밀림에서 나무를 타고 있을 마장동 김씨도 다시 마장동으로 돌아올 수 있다. 파괴의 시대, 슬픔의 관성 속에서 조근조근 노래하자. 그리고 옆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며 손을 잡자. 손의 온기가 남아있다면 함께 조근조근 노래하자. 나와 너의 슬픔을. 고려대철학과2학년 l 김바다 rednomad@empal.com

Sat Oct 28 2006 16:3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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