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왜 사진을 찍는가?

우형진

왜 사진을 찍는가? 사진은 만남이고 이별이며 미칠 것 같은 환희이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다. 상상도 못했던 결정적 순간과의 만남 그 환희를 기록하기 위해 첫셔터를 누르고, 이제 다시는 그 순간과 만나지 못하리라는 예감 속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마지막 이별의 셔터를 누른다. 그 첫셔터와 마지막 셔터 사이에 내 짧은 삶이 포커스도 맞지 않은 초라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 (익명 / 무제) 써야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막막하던 찰나, 우려먹을 '꺼리'가 있을까 하여 지난호를 들추어본다. 사진은 그것을 보는 이에게 자극으로 작용하여 무의식 속에 잔존하는 그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추억을 곱씹게 하는 충격으로 작용하며, 사진을 바라보는 이는 사진이 담고 있는 피사체를 자신의 기억 속에서 변화시키고 왜곡하며 자신의 추억마저 변화시킨다. 이미 사진은 기록으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기억과 동일시 되어버린다.이처럼 사진이라는 매개체의 존재는 우리의 기억과 기록의경계를 더욱불분명하게 한다. 나는 이것이 사진이 가진 매력이라 생각한다. (지난 3월호 기사) 나는 우리가 사진으로 박아놓으려는 모든 기억들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의 사진기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어쩌면 매트릭스의 세계마냥, 모든 것이 꾸며진 거짓일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당신이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 의지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과연 사실이라 할 수 있을까. (5월호)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답을 굳이 밝히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의식 주위를 떠도는 수많은 의미 없는 존재들(구조 없는 존재들), 즉 시뮬라크르(음영)이다.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 이경률 / 마실출판사 中 발췌) 마르크스는 사물에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용가치는그 사물의 쓸모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교환가치는 '상품' 그 자체를 일컫는다고 할 것이다.허나 이후의 수많은 철학자가 의문을 제기해왔듯이, 사물에는 분명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만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는 듯하다.애인과의 기념일에 선물한 향수가 '신체 특정 부위 혹은 전체에 좋은 향기를 남겨주는 액체'나 '35,000원 짜리 상품'인 것만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앨범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많은 사진들. 싸이월드 사진첩에 무차별적으로 불펌되어있는 여러 사진들에도선물해 준 향수만큼이나 특정한 가치가 담겨있는 것 같다.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것만큼 소중하고도 비생산적인 요깃거리는 없으니 말이다.하지만 모든 사진이 각기 똑같은 '가치'를 담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의 증명사진은휴지조각이나 다름없지만, 내가 너무도 좋아했던 스타의 한정판 브로마이드는일생의 보물처럼간직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사진은 내게 의미가 있을 때에만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는다는 것일까. 흐음-_-...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지금은 소중한 사진일지라도 나중에는 쓰레기통에 쳐박히는 경우도 허다할 뿐더러,아무리 소중한 사진이라도 그 사진 안에 담긴 시계의 가격까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진이 소중한 것은 그 사진과 관련된 나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며, 사진은 그 경험을 어렴풋이 돌이켜볼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로서만 작용할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의 가치는 곧 그 사진과 얽힌 '과거의 경험'이 가지는 가치란 말인가? 분명히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닌 것 같기도 하다.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어내는 것에 불과한 사진에, 과연 어떠한 의미, 가치가 담겨있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길래,일상 속에서 사진은 끊임없이 찍혀오고 있는 것일까.우리는왜, 사진을 찍는가? 철학 서적에 지겹게 등장하는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개념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 원형인 이데아, 이데아의 복제물인 현실, 그리고 현실의 복제물인 시뮬라크르[simulacre]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여담이지만 시뮬라크르라고 쓰여 있는데도 무심코 시뮬라르크라고 읽게 되는 일이 많다 ;;) 하지만 사진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완전한 복제'란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원형과 똑같은 현실, 시뮬라크르란 존재할 수 없다. 사진 속에서피사체의겉모습은 얼추 비슷하게 찍혀나오는 듯 하지만, 내 눈으로 바라보는 물체와 2차원적 평면의 사진으로 찍혀진 물체의 모습이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무엇보다도사진을 찍을 당시의 상황, 느낌 등을인화된 사진몇 장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첫 기사에서적었던 것처럼, 내가 찍은 사진을 내가 볼 때에는 나의 '기억'과 사진의 '기록'이 상호관계하며 당시의 상황을 불완전하게나마 재생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이러한 재생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진이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이 존재하는 시간은 사진을 찍는 상황보다 뒤쳐지기 마련이며, 이러한 시간적인 뒤처짐은 그곳에 무엇인가 흔적이 보존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찍은 사진은 내용에 따라 분류된 앨범이나 사진첩에 꽂히는 과정을 거칠 수도 있고, 그 사진을 몇 번씩 바라보며 과거를 추억하는 매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한 번 찍고 나서 다시 돌아본 적이 없는 사진의 경우 그 공백 자체가 하나의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진과 현실의 시간적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흔적'이 보존되는 상황에서만사진은 현재에까지 자신이 담고 있는 의미를전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진은 그 자체의 존재가 과거의 상황을 복제하였기 때문에, 곧 사진 자체는 과거이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생각 속에서 '흔적'을 통해 재편성될 때에서야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진이 '현실적'인가라는 질문에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시험기간을 맞아 친구의 필기를 복제하고,그 복제물을 다시 다른 친구에게 복제해주는 과정에서 복제물에 원본과 점점 달라져가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처럼 현실의 복제물인 시뮬라크르는 결코 '원본'과 동일해질 수 없다. 플라톤의 말처럼 시뮬라크르는 한 순간도 자기 동일로 있을 수 없는 존재, 곧 지금 여기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되려무가치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줄창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사진을 바라볼 때 그 사진이 '무가치하지 않은' 것처럼,시뮬라크르는 분명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가치를 부여받기 마련이다.플라톤은 틀렸다 ! ( 이런 성급한 -_- ) 대책없이 길어진 잡설을 마무리하기 위해 허접하게나마 들뢰즈의 생각을 잠깐 들어보자. 들뢰즈가 생각하는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 시뮬라크르가 이전의 모델이나 모델을 복제한 복제물과는 전혀 '다른'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플라톤이 이 단어를 사용했을 때의 의미처럼 시뮬라크르는모델의 진짜 모습을 복제하려 하지만, 들뢰즈는 이 시뮬라크르를 복제하면 할수록 모델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단순한 복제물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모델과 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 가는 역동성과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흉내나 가짜(복제물)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성질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개체로서 원본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들뢰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진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타파할 수 있다. 복사물(시뮬라크르)과 모델(원형)이라는 용어 자체는 재현과 객관적 (재)생산의 세계속으로 우리를 얽매고 있다. 사진이 현실을 나타낸다고 단정한다면 사진은 플라톤적인, 무가치한 복제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단정으로 인해 우리는 사진을 통해 과거를 추억하며, 과거의 추억을 위해 사진을 이용한다는 단순한 상정으로 사진의 가치를 폄하하게되는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에 의해 역전된 시뮬라크르의 개념(보드리야르가 상정한 시뮬라크르의 개념이우울하고 비관적인 것이었다면)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사진에 가해온 핍박을 스스로 파괴할 수 있게 된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실제라고 생각되어지는) 모델에 대한 외적이고 기만적인 유사성을 지닐 뿐이다. 실제로 시뮬라크르가 산출되는 과정이나 내적인 동역학은 (가정된)모델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시뮬라크르가 가지는외적인, 기만적인유사성은 단순히 하나의 표면효과,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사진이 생산되는 과정과 사진이 수행하는기능은사진 안에 자리한대상, 곧 피사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만약 제주도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용두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면, 이 사진은 용두암을 포함한 제주도의 배경을 담게 되어 외양적으로는 제주도의 배경을 복제한 시뮬라크르이겠지만 실제로 이 사진은 제주도에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는 매개로 작용하게 됨으로써 '제주도의 배경'이라는 모델의 시뮬라크르로서 자신의 기능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복제물(사진)은모델(제주도여행)의 대역을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또한 시뮬라크르는모델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며, 다른스펙트럼에서 기능한다. 그렇기에 시뮬라크르는모델에 구속받지 않는 하나의 현실적인 개체로서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말 그대로 모델의 시뮬라크르에 대한 투쟁이 전개되는 시점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앞선 나의 결론을 뒤엎어야만 한다. 사진은 현실적이다. 그러나 '현실을 재현해준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진이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만 가치가 부여된다는 생각이 거짓이라는 의미이다. 사진이 가지는 외양적인 '현실성'은 사진이라는 시뮬라크르가 현실이라는 모델의 대역을 맡기 위해 빌린 수단에 불과하다. 모델을 뛰어넘은 시뮬라크르는 모델의 재현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현실'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진은 더 이상 과거의 거울이 아니다. 사진은 그 자체로 과거이며, 위조된 과거이고, 또 하나의 현실인 것이다. 사진의 가치. 민초 5기 서울대 l 우형진 mmmshyal@hotmail.com

Mon Aug 28 2006 06:51: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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