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레드썬 !

우형진

레드썬 ! 레드썬 ! 이제 당신은 깊은, 아주 깊ㅡ은 잠에 빠져듭니다. 당신이 빠져든 세계 속에서는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닙니다.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 눈 앞에 나타나는 것, 귓가에 울려퍼지는 것,신경을곤두세우는 공포, 당신의 몸이 느끼는 모든 것이 거짓입니다.진실이 없는 세계. 당신은 두렵습니다. 이제 셋을 세면, 당신은 입에 손을 물고 바들바들 떨게 됩니다.비에 흠뻑 젖은 강아지처럼, 당신은 개의 소리를 내게 됩니다. 하나, 둘, ....셋. 아침에 눈을 떠보니 눈가가 촉촉했습니다. 나는 꿈 속에서 누군가를 붙잡으려 했습니다. 나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언젠가 본 얼굴도 아니었지만, 그는 나의 동생이었습니다. 5년전, 괴한에게 납치되어 처참히 살해당했던, 나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보다 조금 전 일이 기억납니다. 전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평생 가보지도 못한 경기도 겨울군의 한 고등학교였습니다. 여느때처럼 시험문제를 술술 풀고 나온 저는 친구들과 답을 맞추어 보았더랬죠. 그렇습니다. 언제나처럼 시험 끝나기 20분전에 모든 문제를 다 풀고 좌, 우, 전, 후로 답을 돌렸으니까, 우리반은 이번에도좋은 성적을 거둘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옵니다. 저는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네요. 한번도 본 적 없는 아파트 단지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편안한 우리 집. 우리 집입니다. ( 저희 집 사진입니다. 오래 전에 본 타워펠리스를 닮았네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저희 아파트단지에는 작은숲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코너에만 들어서면 꼭 심한 악취가 풍기는나무가 있어요. 그 나무가 무슨 나무냐구요? ..... 모릅니다. 나무에요. 어떤 냄새냐구요? ..... 모릅니다. 악취에요. 그 나무를 지날때면 언제나 마음 한 켠이 아려옵니다. 이미 잊어버린 옛 추억이 되살아나는 것 마냥, 지워버린 지난 사랑이 아련이 떠오르는 것 마냥, 집에서 나설 때, 집으로 돌아올 때, 저는 저만의 경건한 마음을 그 냄새나는 나무에 담아 지긋히 인상을 구기고는 했습니다. "다 네 탓이다 !" 나무가 참 아름답죠? 저렇게 생긴 나무였어요. 아니, 절대 저렇게 생기지 않은 나무였어. 그 나무에선 미치도록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거든... 그 나무는... 참 아름다웠지. 나무 곁을 지나가던 어느날, 저는 오늘도 나무에게 가벼운 찡그림을 선사합니다. 나무가 웃네요. 남의 속도 모르고... 아니, 이제 보니 나무가 아닌 것도 같네요... 아니, 그건 나무였어. 비트러지듯이 곧게 서있는, 미치도록 고약한 악취를 내풍기던, 서럽고, 경건하고, 슬프고, 아름다웠던.... 나무였어요. 불현듯, 저는 제 주위에 어느덧 가족들이 모여있음을 발견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상당히 왜소하시네요... 저희 어머니는... 방금 계셨는데 사라지셨어요... 어머니가 아니었나봐요. 아니, 어머니가 안 계신가봐요. 저희 형을 소개할게요. 아니, 제 친구네요? 아니, 제 형입니다. 저는 형을 무척 사랑해요. 귀신에 홀린 것처럼요. 누나가 있습니다. 아무말도 없이 땅만 보며 걷는 누나에요. 굉장히 아름답네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아요. 마치... 나무처럼요. 뚜벅, 뚜벅.. 누군가 걸어옵니다. 아니,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걸어옵니다.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 이내 나는 검은 우비를 입은 사내아이를 발견합니다. 그와 눈이 마주칩니다. 아주 선한 눈동자네요. 나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미칠 듯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내 동생입니다. 5년전에 무심히도 저 멀리 달아나버린, 사랑하는 제 동생입니다... 저는 평소의 말버릇처럼 나즈막히 말을 건네었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동생이 저를 알아보았나봅니다. 그 선한 눈동자가 이내 웃음을 머금습니다. 꽤나 반가웠던 모양이지요.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습니다. 이러다 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와락 !" 그를 껴안았습니다. 따뜻합니다. 그도 나를 껴안습니다. 손이 따뜻합니다. 우리는 어느덧 울고 있네요. 당연하죠. 동생은 나를 가장 사랑했으니까요. 엄마도, 아빠도, 큰 형도, 누나도 아닌 저만을 사랑했어요. 아니, 다른 사람은 싫어했어.... 멀리 가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십니다. .... 무정하게도 가버리십니다 그려. 5년만에 아들을 만나는데 말입니다. 저는 혀를 끌끌 찹니다. 혀를 끌ㅡ끌ㅡ 찹니다. 혀를 차면서 저는 동생의 두 팔을 꽈악 붙잡습니다. 움직이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꽈악 붙잡고서는 그를 따뜻하게 쳐다봅니다. 아버지는 이내 저 멀리 앞으로 가버리렸습니다. 동생이 말하네요. "왜 나를 붙잡았어요..." ..... 그렇게 제 동생이 사라져갑니다.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붙잡습니다. 가지말라고 ! 가지말라고 ! 붙잡아보지만 그가 잡히지 않습니다. 잡히는 것은 허공뿐이고, 잡히는 것은 허공뿐이고, 보이는 것은 나무뿐이고, 보이는 것은 천정뿐이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었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꽤 생생한 꿈을 꾸는 편이다. 그러나 그 꿈의 황당하기란 끝이 없어서 전 세계를 누비는가 하면, 아이스볼트 마법을 날리기도 한다. 일전에는 내 꿈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잠들기 전에 줄곧 공룡에게 쫓기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그날 밤 나는 고향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공룡의 발길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막다른 길에서는 어김없이 비밀통로가 나왔고, 초등학교의 화장실 변기 속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공룡을 나를 찾아내었고, 다른 사람이 시가지에 널려있는 데도 나만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나는 꿈 속에서 공포에 시달리며 계속 달려야만 했다. 잔인한 공룡 녀석... 가끔은 그 꿈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해서, 스토리 전개가 모두 기억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장면마다의 연계성은 제로에 가깝다. 남자였다가 여자가 되기도 하고, 네 아이의 아빠였다가 머리 짧게 깎은 중학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꿈 속에서의 모든 사건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의혹감은 사라진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진실이고, 모든 것이 거짓인 세상이다. 그런 생생한 꿈을 꾸고 일어날 때마다 나는 항상 나의 존재를 의심한다. 장자님의 호접몽을 꾼 것인마냥, 꿈이 진짜인지, 현실이 진짜인지 약 10초정도 패닉에 빠진다. 하지만 나에게 현실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 현실 속에서 인과관계는 내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형진이었고, 공룡과는 살아 생전 만날 수 없는현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포스트모던하게(허울은 참 좋다), 극단의 회의주의로 빠져들어보자. 내가 보는 것이 진실로 내가 보는 것인가? 내 얼굴은 내가 보는 것처럼 생긴 것일까? 혹시 영화 '디 아이'처럼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얼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내 얼굴을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거울? 사진? 거울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렌즈를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내 눈에 모이는 것이라고는 코, 팔, 다리, 몸통 뿐인데. 내 몸이 과연 연결되어 있기는 한 것일까? 옳다는 것은 무엇일까?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 사회는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엉켜있을지도 모른다. 몸이 조각조각 분리되어있는 듯하면서도,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래, 입이라는 거 처음부터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하하하. 가만히,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을 어줍잖게나마 되새계 본다. 생리적 조산설(인간은 여타 동물들과는 달리 불완전한 개체로 태어난다는 주장)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기는 주변은 어느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시각이 발달되어도 아기의 눈에 비치는 것이라고는 신체의 부분부분일 뿐이다. 이 단계의 아기는 자신의 몸이 조각조각 나있다고 생각하며 극도의 불안정에 시달린다고 한다.아기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불안감에 시달린다. 자신의 눈에 비치는 다른 사람들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서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낸다. 심지어 어려운 단어의 발음까지도 곧잘 해낸다. 아기에게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빠른 말들을 서로 주고받는 어른들. 아기에게 있어 어른들의 모습은 자신의 이상형이자, 자신을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러던 아기가 거울을 만나게 된다.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아기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곧 자신임을 깨닫는다. 자신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움직이고, 자신이 비로소 하나의 완전한 개체임을 드디어 깨닫게 된다. 엄마에게 안겨 거울을 바라보던 아기는 엄마를 바라보고 거울을 바라보고, 또다시 엄마를 바라보고 거울을 바라보며이내 환호성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 이렇게 아기의 자아 형성은 '거울'에 의해 구속되어 있다. 아기는 자신의 존재를 확신시켜줄 그 무엇인가에 목말라있다. 이내 아기는 '언어'를 익히게 되고, 그 언어에 구속되어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마침내 자아로 성장한다. 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자아, 분열된 자아. 이를 라캉은 $라고 표현하고 있다.(분열된S) 나는 우리가 사진으로 박아놓으려는 모든 기억들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의 사진기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어쩌면 매트릭스의 세계마냥, 모든 것이 꾸며진 거짓일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당신이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 의지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과연 사실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여러분께 적어내려가는 글자 하나하나는, 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필사적으로 밝혀내려고 버둥거렸던 지난 나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길고 긴 '최면'의 세월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것이 못내 궁금하다. "이제 당신은,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 "당신은 왜 손을 깨물고서 벌벌 떨고 있는거죠?" "...... 선생님. 제가 요즘 이빨이..... 좋지 않아서 확인해보려던 참입니다. 최면 결과는 어떻던가요." ".......사람은 의식을 넘어선 인과관계를 마음대로 설정하려고 하더군요. '오인' 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민초 5기 서울대 l 우형진 mmmshyal@hotmail.com

Sat Apr 29 2006 19:24: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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